(제18일 차 / 모라티노스 ~ 레알 까미노)
오늘(10.12)은 모라티노스 (Moratinos)를 출발하여 ▷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까지 총 20.km를 5시간 30분 동안 4만 5천3 백보를 걸어서 이동했다. 오늘은 거의 평지길이지만 그늘이 없어서 힘들었다.
메마른 메세타 평원을 통과해서 출발지로부터 13.1km를 걸어서 카스티야 이 레온 주의 사아군(Sahagún)에 도착했다. 사아군이라는 이름이 우리말 같아서 의아스럽다. 사아군은 프랑스 순례길 출발지인 생장피드포트에서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중간 지점으로 보고, 생장피드포르에서 사아군까지 걸은 사람에게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사아군은 알폰스 6세 때 크게 발전했다. 그는 대수도원을 정치, 문화, 기독교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클루니 수도회를 통해 로마의 보편적 전례를 도입하였다. 그는 1086년에 전례개혁과 함께 수도원과 도시에 자치권을 부여함으로써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하군은 스페인 레온 지방에 위치한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마을 중 하나로, 종교적 및 역사적 유산이 풍부한 곳이다. 사하군은 특히 중세 기독교 수도원 문화의 중심지였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산 후안 데 사아군' 성당은 산 후안 데 사아군의 부모가 살던 저택 위에 지은 17세기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으로 내부에는 이 마을의 수호성인인 산 후안 데 사아군의 성당이 있다. 산 띠르소 성당은 12세기에 지은 성당인데 사각형 탑은 사아군의 무데하르 양식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라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6~18세기에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좌) 산 후안 데 사아군 성당 (우) 산 띠르소 성당
10시에 아침 식사로 식당에서 라면을 다소 비싸게 5.5€를 지불하였다. 한국 순례자들이 많은 탓이려니 했지만 유럽 사람들도 라면을 즐겨 시켜 먹는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햇반으로 해결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품절이라서 이름 모를 빵으로 대신했다. 빵집에서 임의적인 순례자 공동체 중에서 한 사람이 나에게 접근했다.
외국인 순례자들이 레온까지 택시로 점프한다고 동지들을 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택시로 레온까지 점프를 하면 걸으면 이틀이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 이내로 이동할 수 있단다. 비용도 나눠 내면 감당할 순으로 싸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아 기력이 약해 보이는지 나를 꾀려 들었다. 나는 의연하고도 박절하게 대답했다.
“내 사전에는 점프란 없다. 나는 걸어서 레온을 거쳐서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할 계획이다.”
그들은 나에게 성공하라는 덕담의 악수를 나누고 바이바이 했다.
순례길은 로마 군단이 오갔다는 도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길을 따라가면 이태리 반도로 갈 수 있는지 모르지만 아득하기만 한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상당수 작은 마을들은 갈색으로 멍들어 죽은 마을, 아니 유령마을 같았다. 우리 농촌과 다를 바 없이 인구 절벽에 몰려 조용히 죽은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보낸다. 주민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순례자들이 주민 행세를 한다. 호랑이가 없는 산중에서는 토끼가 왕이듯이 그들은 자기들이 놀았던 동네 골목에서처럼 낄낄대거나 왁자지껄 떠들면서 마을을 통과했다.
순례 길에는 옥수수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아직도 말라비틀어진 갈색 옥수수 대에 매달린 옥수수들이 많았다. 옥수수는 나무인가? 풀인가? 윤선도의 "오우가"에서 대나무를 옥수수로 패러디해 본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꽉 차 있는가?
저러고도 3 계절 살다 가노니 그것을 설워하노라.
수염 달린 옥수수 머리가 땅 쪽으로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처럼 처참하게 보였다. 이런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다. 순례길 주변에 옥수수 농장에서 트랙터가 왔다 갔다 하면서 수확을 하고 있었다.
넓은 들판에서 생산된 옥수수를 실어 가는 트럭의 기사들은 운전석에 앉아서 휴대폰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다. 옥수수 알을 털어서 자루에 담아 대기 중인 트럭에 실고는 먼지로 순례자들을 사워 시켜주며 광야를 떠났다.
옥수수 알을 재료로 해서 빵이나 뻥튀기, 팝콘 등으로 변신하여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리라라. 기억의 창고에서 옥수수가 꿈틀거린다. 나는 면 지역에 살면서 읍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내 외양에서 가난의 냄새가 낫는지 모르지만 담임선생님은 나를 억울하게도 극빈자로 분류하여 ‘강냉이 죽’이나 ‘옥수수 빵’과 주먹밥을 급식으로 학교에서 얻어먹게 되었다.
부잣집 애들은 고소한 옥수수 빵이 먹고 싶었던지 자기 도시락과 내 빵을 바꿔먹자고 조르는 애도 있었다.
어머니는 자주 옥수수 뻥튀기를 만들어 오셔서 우리 네 형제들에게 간식거리로 나눠주셨던 기억도 삼삼하다.
서양영화를 보면 옥수수 빵(콘브레드, 토르티야, 아레파 등)은 종종 빈곤과 생존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특히 미국 남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식량 부족을 경험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이런 상징성을 강하게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1969년대 구 소련의 지도자였던 후르시초프가 옥수수 정책 실패로 물러났다는 사실을 선배가 쓴 책 <모스크바 1200일>이라는 책에서 읽고 알았다. 후르시초프는 1950년 무렵, 미국을 방문했을 때, 무르익은 황금빛 옥수수가 물결치는 아이오아의 가을 들판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련의 광대한 시베리아 땅에 옥수수를 심어 잘 익은 것은 식량으로 쓰고, 덜 익은 것은 사료로 사용하여 목축업을 장려시키면 우유와 단백질 문제를 해결하는 일석이조 일 것 같다는 판단을 한 모양이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대대적인 옥수수 경작운동을 전개했다. 개간지는 물론이고 기존의 경작지에도 옥수수 재배를 독려하는 한편, 옥수수 연구소를 설립했고 기관지 “쿠쿠루자(옥수수)”를 발간케 하였다.
옥수수는 갑자기 '들판의 여왕'으로 국영농장과 집단농장마다 군림하였으며 기세가 등등해진 후르시초프는 2∼3년 내에 육류와 우유, 버터 생산이 미국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기후조건과 토양의 차이를 무시한 옥수수 경작지 확대 때문에 다른 작물들의 순환재배와 목초생산의 격감을 초래하게 되었다. 1963년 소련은 금괴를 팔아 국제시장에서 곡물을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참담한 결과로 끝났다. 후르시초프를 썰어 소시지를 만들자는 화난 민중들의 구호가 난무할 정도였다. 마침내 그는 1964년 10월 실각하여, 평범한 연금생활자로 전락하여 일생을 마쳤다(서현섭: 237-238).
청년시절에는 애인과 팝콘을 군것질을 하며 명동 바닥을 훑고 다녔다. 이른바 어르신이 되어도 옥수수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해마다 철마다 강원도 출신 며느리 친정에서 보내준 옥수수를 잘 얻어먹고 있다. 옥수수를 생채로 냉동고에 넣어 보관했다가 비수 계절에 꺼내서 삶아 먹으면 더 맛이 있다.
며느리를 도시에서 맞아들인 친구들은 그런 고소한 맛을 모를 거다. 옥수수를 먹고 싶으면 돈 내고 사 먹을 형편은 넉이 되지만 내게 거지 근성이 숨어 있는지 몰라도 사돈댁에서 보내주신 옥수수가 더 맛있다. 사돈댁과는 일 년 내내 전화 한 통 없다가 옥수수를 받고서 고맙다는 전화라도 하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다고 계속 보내달라는 청원은 아니므로 오해 마시길---. 옥수수는 사돈끼리 마음을 연결하는 촉매가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숙소에 도착한 후에 비가 내려서 밖으로 나가 마을을 탐사하지 못하고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를 마지막까지 다 읽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순례자"는 주인공 파울로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걷는 여정을 통해 영적 성장과 자기 발견을 꾀하는 이야기이다.
파울로는 기사단의 비밀 의식을 실패한 후, 잃어버린 검을 되찾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떠난다. 이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파울로가 다시 자신을 인정받고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찾아야 하는 상징적인 물건이다.
파울로는 '람'이라는 기독교 단체에서 가장 높은 지위인 마스터에 오르기 직전에 올랐다. 하지만 마스터로 임명받으려는 찰나, 마스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검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이 검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안내자인 페투루스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르는 순례길에서 검을 찾아 나섰다.
페트루스는 이 여정에서 파울로에게, 영적 훈련방법을 전수한다. 구체적으로는 ① 씨앗훈련 ② 속도훈련 ③ 잔인성의 훈련 ④ 사자(使者)의 의식 ⑤ 직관을 깨어나게 하기 ⑥ 푸른 천체 의식 ⑦ 산채로 매장당하는 훈련 ⑧ 람 호흡법 ⑨ 그림자 훈련 ⑩ 듣기 훈련을 차례차례 알려준다. 그는 파울로가 일상적인 사건 속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자신과 주변 세상에 대해 더 큰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돌봐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파울로는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 자신의 영적 성장을 도모한다.
순례길에서 작가 파울로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한다. 그는 내면의 두려움, 의심, 욕망 등과 마주하면서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자신이 찾고 있던 검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파울로가 진정한 영적 자유를 얻는 순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 ‘순례자’에는 '선한 싸움'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선한 싸움'이란 인생에서 자신이 믿는 가치와 목표를 위해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외부의 적이나 장애물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터 잡고 있는 두려움, 의심, 나태함과 같은 내적 장애물과 싸우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선한 싸움'을 각자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 싸움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을 통해 인간은 내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며, 자신의 진정한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 파울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다양한 어려움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선한 싸움"을 경험한다. 결국, 소설 ‘순례자’는 영적 성장의 중요성과 자기 발견의 의미를 일깨우는 철학적인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 ‘파울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자신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였다고 한다. 나 또한 이 여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내면의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내용들이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픽션인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첫 장부터 끝장까지 몽롱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페트루스의 존재도 파울로의 경험도, 그들이 만났던 ‘집시’와 악마인 ‘개’도 초현실에서 헤매게 만들었다.
(삼성창업자 이병철의) 질문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 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차동엽 신부는 종래의 천주교 입장이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리가 바뀌었음을 일깨운다. 이전의 천주교는 개신교까지도 다른 종교로 보았으나 이후부터는 타 종교의 구원여부는 신이 결정할 문제이므로 천주교는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차동엽: 질문 12에 대한 대답).
김안제 교수는 종교의 종류와 유무신론에 불구하고 착한 삶을 산 사람은 모두 천당이나 극락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김안제: 754).
따라서 천주교는 하느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주어졌다는 믿음은 변함이 없으나, 하느님은 그분의 뜻대로 자유롭게 모든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자비로운 존재라고 여긴다. 따라서 하느님을 모르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도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개신교 신자인 이어령 교수는 천주교를 개신교로 대체하여 그 대답을 성경의 사례를 가지고 설명한다(이어령: 44-45).
--길거리에 나그네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제사장도 레위인 사제도 다 못 본 척하고 지나가요. 이교도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만 나그네를 살려주고 갔어요. 그러면 제사장이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아무 관련도 없는 이교도가 천국에 가는 거예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이면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가 세계 종교가 된 겁니다. 기독교인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면 세계적인 종교가 못 됐어요.--
다음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 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천국에 간다고 대답했다. 무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착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종교 유무와 상관없이 마음이 가난하고, 슬픔을 아파하고, 온유하고, 정의를 갈망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정의를 위해 고난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이런 자격들을 가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에도 슬픔을 겪는 사람이 많고, 생명을 존중하고 불쌍히 여기며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했던 선비들처럼 좋은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은데, 이런 분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모두 천국에 가 있을 거란다. 결론적으로 어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진심으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과 함께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다 좋은 곳으로 갈 거란다(이어령: 45-46).
결론적으로, 천주교 교리는 하느님이 인간의 내면과 삶을 심판하신다는 믿음 아래, 무신론자, 무종교인, 타 종교인이라도 선한 양심과 도덕적 삶을 살았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다. 다만, 개신교는 천주교의 위 구원관과는 약간 다르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못을 박는다(요한복음 14장 6절),
그러면 그 예수의 존재를 듣지 못하여 그를 믿지 못한 사람은 모두 구원받을 수 없는가라는 의문이 있다. 이에 대하여 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다. 생각건대, 2,000년 전에 세상에 살았던 그 예수라는 존재를 듣지 못했더라도 희미하지만 구원계시를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본다, 즉, 인간이 모두 죄인이고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그 죄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존재를 믿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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