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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두부 Nov 12. 2024

엄마 나는 이런 데서 절대 못 살아

절대라는 말은 하지 말걸



1. 평화로운 동네였던 경기도에 살던 나는 명절마다 친가인 서울에 가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이 사는 그곳, 서울 마포구 동교동.

끼익 무겁게 열리는 철문소리와 정겨운 마당, 2층으로 된 할머니댁은 어색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그리운 곳이었다. 나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좋아했다. 작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 1층이 나오는 구조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마당으로 나가면 삽으로 마구 흙을 퍼 나르며 놀았고 주택 특유의 냄새가 좋았다. 아파트에서만 살았으니 아마 더 신기하고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아버지는 집을 팔고 연희동의 아파트로 이사하셨기에 나는 더 이상 그 집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카페로 바뀐 듯하다)


2. 고등학교 3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지막으로 본 할머니의 얼굴은 내가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할머니댁 2층계단에서 어린 나를 반기던 할머니도 그 집도 더 이상 볼 수없게 되었다. 그 후 맞는 명절부터는 연희동의 아파트로 가게 됐다. 1년에 두어 번씩 가는 연희동은 해가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차들도 사람도 많아졌다. 도로도 늘 바뀌고 크고 새로운 건물들도 많아졌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홍대 근처에 진입할 때면 숨이 턱턱 막히곤 했다. 나는 홍대역을 지나 연희동으로 가는 길에 늘 똑같이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는 절대 못 살아'


3. 집을 좋아하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충전이 되는 극내향인인 나에게 홍대입구역은 생각만 해도 기가 빨리고 사는 맛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곳이었다. 매연냄새도 쉴 새 없이 다니는 버스들과 온갖 쓰레기들이 버려진 더럽고 좁은 인도도 싫었다. 부딪히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며 다녀야 되는 것도 말이다.


4. 부모님의 이혼 후 우리 가족은 다 뿔뿔이 흩어졌다. 고로 나도 홀로 살 곳을 찾았고 살던 곳과 가까운 곳에서 1년을 살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월세계약이 끝난 후 나는 새로 살 집을 찾아야 했지만 수중에 돈이 많지 않았다. 돈이야 벌어서 구하면 됐겠지만 당시 나는 무기력한 상태였다. 부모님의 오랜 불화로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다. 아빠는 나를 짐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고 멀리 사는 엄마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댁이 생각났다. 아직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가족이 사는 곳에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그 이듬해 겨울, 연희동 할아버지댁으로 들어갔다.  절대 살고 싶지 않았던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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