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박스정도 되는 짐을 가지고 할아버지와 큰 집 식구가 같이 사는 집에 들어가게 됐다. 내가 썼던 방은 현관에서 왼쪽 편에 있는 방이었다. 베란다가 있는 방이었지만 베란다는 거의 창고처럼 되어있어서 뭔가를 더 넣을 순 없었다. 방은 좁지도 크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책상과 작은 침대정도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다. 퀸 사이즈가 조금 넘는 침대 하나가 (거의 킹사이즈정도였던 것 같다.) 방 한가운데에 있었고 책장은 있었지만 책상은 없었기에 나는 좌식형 탁상을 하나 구매해서 아빠다리를 하고 그 탁상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이런 작은 탁자에서도 그림은 그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2. 처음 할아버지댁에 들어간 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큰아빠와 큰엄마 그리고 친척오빠도 살고 있었던 집이라 나는 갑자기 들어온 불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아빠는 그 집은 할아버지 집이고 할아버지가 허락하셨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난 그 말이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치는 보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한테 연락하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툭툭 성의 없이 던져지는 내 짐 박스처럼 나는 그 집에 그렇게 짐이 되어 들어온 것 같았다. 그날 큰아빠는 내가 집에 들어왔다며 환영케이크를 사 오셨지만 나는 큰엄마의 표정을 보고 웃을 수도 없는 심정이었다.
3. 할아버지는 조용하신 분이고 시끄러운 걸 싫어하시는 편이라 나는 그 집에서 할아버지와 부딪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큰 집 어른들이 다 나가고 할아버지와 나 이렇게 둘만 남겨졌을 때가 편했다. 할아버지는 가끔 내가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뭐 하냐고 물어보시고 내가 문을 열어야 들어오셨다. 겨울에는 방이 춥진 않은지 여름에는 문을 닫고 있으면 덥지 않은지 늘 물어보셨다. 그때 유일하게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게 그 집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4. 생각해 보면 홍대에서 살게 된 것이 힘든 것도 많았지만 홍대였기에 버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다들 바쁘게 움직이느라 서로의 인생에 관심도 적고 매일매일 새롭게 마주치는 사람들, 익숙해졌다 싶으면 바뀌는 가게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의 슬픔들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5. 나는 그때쯤 연애도 하고 있었다. 꽤 오래 사귄 남자친구였는데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창이자 동갑인 친구였다. 착한 친구였지만 나도 그 친구도 어렸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집에서 거의 매일 밤을 울었는데 심지어 남자친구와 통화를 해도 우울함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그도 떠다니는 섬을 바라보는 외지인일 뿐이었다. 그 친구의 잘못도 섬이 된 내 잘못도 아니었기에 후에 그 친구와는 잘 헤어지게 됐다. 다행히도 나는 힘들지 않았다.
6. 할아버지집에서 산지 2달이 좀 넘어가던 무렵 나는 저녁마다 큰엄마와 마치 면담하듯 얘기를 나눴다. 피곤하다던가 그러면서 대화를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었다. 대화의 내용은 늘 같았다. 독립에 대한 얘기였다. 속 뜻은 나가라는 얘기였다. 나도 그 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게 너무 힘들었기에 돈을 모아서 최대한 빨리 나오고 싶었다. 그래서 일을 하고 있었고 최대한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서 밥도 따로 냉동식품을 주문해서 먹었다. 적었지만 돈도 드리고 있었다. 다달이 백만 원 정도를 냈다면 그런 말을 덜 들었을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 나가라는 말을 빙빙 둘러 날 위한 말처럼 얘기하는 그 대화가 날 조금씩 더 힘들게 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3개월이 조금 넘는 시점에 나오게 됐다. 나는 나올 만큼 돈을 모은 것은 아니었고 생을 끝낼 마음은 준비되어 있었다.
7. 평소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엄마나 아빠에게 하지 않았다. 엄마한테는 한번 정도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러게 왜 할아버지집에 들어갔냐는 말을 들은 후로는 하지 않았고 아빠는 애초에 날 짐처럼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잘 지내고 있는 척을 했다.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늘 내가 먼저 안부를 물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큰엄마가 저녁시간에 날 불렀고 나는 거실로 불려 나가서 결정적으로 집을 나가게 해 준 말을 듣게 됐다. 큰엄마가 보기에 아빠는 너를 책임질 생각이 없어 보이니 네가 빨리 돈을 모아서 집을 구하라는 얘기였다. 아빠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쯤이야 나도 알고 있었다. 돈을 모아서 나가라는 뉘앙스의 말쯤이야 이제 익숙해져서 빨리 돈이 모이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에게 너의 부모는 널 생각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쓴다는 식으로 얘기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우울은 주로 날 무기력함으로 몰아가는게 대부분이지만 이때만큼은 설명하기 힘든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얘기까지 들으면서 살아야 되나 하는 마음에 나는 아빠에게 바로 문자를 보냈다.
[여기서 더 못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나는 정말 생을 끝장낼 생각이었다. 저 문자에 화를 낸다던가 무시한다면 정말이지 죽을 생각이었다. 돈을 모아 나와서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고 홍대에도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이런 말을 들었고 그동안 매일 저녁마다 언제 나갈 거냐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빠는 크게 화가 났고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했다. 나는 그 집에서 나오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빠가 화를 내는 이유가 내가 힘들었어서가 아닌 자신을 책임감도 없는 사람으로 얘기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집을 몇 군데 본 후 아빠의 돈으로 연남동에 있는 한 원룸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8. 더 이상 눈칫밥을 안 먹어도 돼서 예민했던 위가 점점 가라앉아갔지만 우울함은 여전했다. 자잘한 외로움들과 우울감들은 연애로 일시적으로 방어했지만 뿌리 깊은 우울함은 외면했다. 외면하다 보면 위험하게도 살아지기는 했다. 나는 그맘때쯤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치욕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홍대에서의 1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