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학습자의 상황, 문화와 맥락, 이론을 종합하여 실천하는 교육은 일종의 예술작업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교육은 결국 학습자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기에 교육자 입장에서 교육은 너머의 예술, 즉 메타 예술에 가깝다. 성장이란 결과물을 교육자인 내가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빚어내는 것이기에, 교육은 그 너머에서 학습자가 스스로를 아름답게 빚어낼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자들은 언제나 ‘좀 더 개입하기를 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학습자가 어떻게 변화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학습자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빚어내려는 시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레비나스에 의하면 교육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변화하도록 의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좋은 교육은 적당한 폭력을 통해 학습자가 그래도 자신이 스스로의 삶을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하는 교육이 아닐까 싶다. 아니, 사실 정말 좋은 교육은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폭력성이 어느 정도인지’와는 연관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평가도 결국 특정한 문화와 맥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브라질 빈민에게 프레이리가 실시한 의식화 교육은 명백히 의도된 학습자의 변화 모습이 존재하고, 타인을 계몽하고자 하는, 폭력적인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의식화 교육이 좋은 교육이 아니라고 봐야 하는가? 계급적 위치에 따른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의식화하는 것은 세뇌에 해당하며 학습자를 타자로서 존중하지 못하기에 부정적인 교육이라고 봐야 하는가?
타자의 다름을 온전히 인정해야 된다고 보는 문화권의 사람들은 이를 부정적인 교육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옳다 하더라도, 다분히 계몽적인 목적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사회주의자나 비판이론의 지지자들은 의식화를 통해 자신의 계급적 처지를 이해하고,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기에 좋은 교육이라고 볼 것이다.
결국 홍상수 감독의 영화 제목인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말처럼 모든 교육은 언제는 맞고, 언제는 틀릴 것이다. 또한 어떤 문화와 맥락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교육이란 메타 예술을 하는 교육자는 그 순간의 최선의 실천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스스로를 갈고닦아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나아가 그렇게 갈고닦았다 하더라도 언제나 마음 한 켠으로는 자신의 작품을 의심해야 될 운명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항상 품고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 내가 만든 교육이 과연 지금도, 여전히 좋은 교육인가?
2. 이전의 영광에 도취된 것은 아닌가? 지금은 효과적이지 않은 면이 있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
3. 새롭게 알아야 할 이론이 있는가?
4. 최근 만나게 되는 학습자들의 경험에 이전 학습자들의 경험에서 새롭게 추가된 지점은 무엇인가?
5. 이전과 달리 새롭게 변화한 문화, 맥락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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