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2년 3월.
감각으로 기억되는 기억은 대부분 낮보다는 밤 산책에 있었다. 자전거 조명 하나만 의지한 채 실컷 달렸던 춘천 공지천에서의 자전거 질주나 그 여정의 끝, 중단된 도로까지 가서 마주한 둥근달. 깜깜한 밤 불빛 하나 없는 동네에서 반딧불이 보겠다고 나갔다가 애꿎은 풀만 툭툭 치고 돌아온 어느 여름날. 또 뭐가 있을까. 아침저녁으로 난처한 일 함께 겪고 담배 태우던 친구 옆에서, 차마 담배는 못 피우고 차가운 저녁 공기와 담배 연기까지 조금씩 들이마시던 어느 골목길.
밤은 흐릿하면서도 또렷한 감각들을 불러일으킨다. 그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그런 존재들이라 그런가 보다. 흩어지는 조명과 물에 비춘 윤슬, 차가움 가득 머금은 바람, 그리고 어둠 속 더 집중하게 되는 타인의 목소리. 우리의 발소리와 다가가면 사라지는 풀벌레의 노래. 모두 형체 없이 밤의 고즈넉함에 기댄 채 잠시 머물다가 아침이면 사라져 버리는 안개와도 같다. 해가 뜨면 그 공간엔 물기 어린 생동감이, 따사로운 햇살과 분명하게 들리는 새소리가 흐릿함에서 벗어나 경계를 분명히 한다. 낮은 그렇게 찾아온다.
올해도 어김없이 밤 산책을 했다. 해방촌 골목골목엔 작은 술집과 카페들이 모여있었다. 칵테일을 판매하는 곳엔 작은 테이블 하나가 배치되어 있고, 벽면 가득 술병들이 자리 잡았다. 저곳에서 사람들은 어떤 대화를 나눌까. 술 한잔 마시고 따듯해진 몸에 이어 그간 긴장했던 마음마저 노곤하게 풀어졌을까. 해방촌 길은 계속 이어져있고 어둠 위에 흩뿌려진 조명들은 계속 이어진다. 공간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멀리서 그 조명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이상해졌다. 은은한 노랑빛. 수련회 캠프파이어 시간에 멍하니 불을 바라보던 그때 느꼈던 감정과도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
저녁부터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분리수거를 위해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고 아빠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부슬비가 이제 막 시작됐고 밖에 나온 김에 좀 걷다 집에 다시 들어가기로 했다. 비를 피해 나무가 많은 곳으로 향하다 하천과 가까워졌다. 물은 아래로 흘러가고 빗방울로 인해 수면이 요동친다. 아파트 불빛이 강가를 비추고 오색 LED 간판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닌다. 참 이상하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들인데. 수백 개의 네모난 직각 창문들이, "파격 할인, 28일까지 진행"이라고 적힌 가게 홍보 조명이 어째서 이렇게 아름답게 보일까. 매연 뿜어대는 자동차의 빨간 조명들도 밤 산책에선 그저 영롱해 보이기만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어쩌면 난 흐릿한 것만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면접장에서 "왜 하필 독일이었어요? 환상이 있는 건 아닌가요?" 이 단순한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 이유. 실제가 아닌 뿌연 안갯속에서 도피처로써의 나라로 삼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면접에서 하지 못한 답변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도 '왜 하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날 문학과 글쓰기가 좋아 독문과도 아니면서 독문 수업, 학회를 쫓아다니던 날들은 진심이었다고 쳐도, 정작 한 달짜리 여행에 불과했으니까. 작년에 나는 코로나가 무서워 교환학생을 취소했고 우연히 한달살이로나마 독일을 짧게 경험했다.
얼마 전 교환학생 일 년을 채우고 독문과 동기들이 돌아왔다. 사람도 도시도 사계절은 진득하니 지내봐야 그 진가를 아는 법 같다. 다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 모습에 지난날의 내 선택이 후회되기도 했다. 지나간 시간이야 그러려니 한다고 치더라도, 흐릿한 시야는 도무지 또렷해지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실체는 여전히 잘 모르는 채로, 어쩌면 환상 속에 있을 독일이 좋고, 문학과 글쓰기가 좋다. 무서운 일들이 반복되는 사회에서도 연대와 지지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은은한 조명에도 달려드는 하루살이처럼 밝고 따듯함엔 정신을 못 차리고 날아갈 준비를 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행복해요." 두려운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물안개처럼 뿌옇고 흐릿함 속에서 자리 잡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그 속에 빠져 내가 다가오는 기회들을 저버리고, 붙잡을 일도 놓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마음이 있어도 주어지지 않는 일에 대한 속상함.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나를 다잡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밤은 분명 흐릿하지만, 그러나 또렷한 감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시동 끄고 숨죽이며 차에서 듣던 개구리 소리. 개굴개굴개굴개굴 굴개굴개굴개굴개- 논두렁에서 들리던 수많은 소리들을 들으며 그곳엔 분명히 수백 개의 울음주머니가 부풀어졌다가 작아졌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늦게까지 과제하다가, 학교를 빠져나올 때 마주하던 큰 나무. 그 나뭇잎들이 사가각 부딪히던 소리와 벽면에 비친 선연한 그림자. 가로등 불빛 의지하며 친구와 팔짱 끼고 걸으며 오늘의 고단함을 살짝 기대었을 때의 포근함.
멋진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의 벅참, 좋은 사람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발견한 보석 같은 문장.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이런 감각들을 나는 아주 잘 느껴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뿌옇더라도 그게 단순히 환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감각했던 내가 아직 그 감각을 잊지 못했으니까. 하루빨리 내가 부연 것들 사이에서 실제로 경험해볼 수 있는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실제와 다른 부분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아름다움은 여전히 실재할 거다.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