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낯설어져야만 하는 세계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을 읽고

by 북극성 문학일기



혀와 언어

언어를 배운다는 것, 혀에 낯선 감각을 기억하게 하는 것



혀를 떠올린다. 입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모양을 상상한다. 선홍빛의 혀. 잘라내도 아무 감각 없는 단단한 손톱과는 달리 물컹거리고 따듯하며 유연하다. 입안 곳곳에 도달하고 갖가지 묘기를 부릴 줄 안다. 동시에 혀의 뿌리는 정해져 있어 결코 입 안을 튀어 나올 수 없는 존재이다. 독일어를 배우는 동안 줄곧 이런 이상한 존재를 떠올렸다. 언어를 배우는 일은 이상한 존재인 '혀'에 낯설고도 특별한 기억을 심는 일이기에.


한편,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에는 혀를 빼앗긴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만의 새로운 언어를 갖기 위해선 오염된 언어를 잃어버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 언어가 기억된 공간을 빼앗겨야만 했다. 그렇게 마침내 주인공은 그 무엇도 아닌 '투명한 관'으로서 자신을 재정의한다.


줄곧 혀를 떠올렸다. 독일어를 공부하며 난 혀를 잃어버리지도 빼앗기지도 않았다. 다만 독일어를 배우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혀는 줄곧 입안 낯선 곳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다. 이를 테면 R 발음을 하기 위해 만들어 내야만 하는 진동 속에서. 혀에 관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을 읽고 쓴 독후감을 아래 첨부한다.






사라진 ‘혀’는 어디로 갔을까. 다와다 요코의 <목욕탕>을 덮는 와중에도 끝까지 들었던 의문이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소설 속 ‘나’가 혀를 되찾았는지 어떤 음모에 사로잡혀 혀를 잃은 건지 말해주지 않는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독법이 잘못되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어느 추리소설 혹은 대하소설처럼 서사에 집중한 읽기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어떤 책은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야만 한다.



<목욕탕>은 낯설어졌기에 진입할 수 있는 미로와도 같다. 작가도 읽는 독자도 낯설어져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저자인 다와다 요코는 이 수수께끼 같은 소설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녹였다. 일본어와 독일어를 모두 할 줄 알아 통역 일을 하는 ‘나’처럼, 저자 역시 열아홉 살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중 언어로 글을 쓴다. 책 속엔 서양에서 살아가는 ‘동양인’, ‘여성’, 외국어를 구사하는 모습에서 집중적으로 저자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저자를 알고 나니 소설을 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건 또 별개의 문제다. 어쨌든 당장 책을 펼치면 파란색 물고기 삽화만이 우리를 반겨줄 뿐이다. 한 장을 더 넘기면 <이인칭 나>라는 짧은 운문이 나온다. ‘어제부터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는데 아직 나는 모르겠다. 나를 뭐라고 바꿔 불러야 할지.’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가 바로 이 시에 있었다.


‘나’는 일본, 독일 무역 회사 간의 식사 자리에 통역사로 함께한다. 담배, 헤어스프레이 냄새가 나는 양쪽의 언어를 정제된 언어로 바꿔 말해야만 하지만, 통역사라는 직업적 측면에서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해야 함은 변함이 없다. 즉 그의 혀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무역 회사들의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소리가 나는 기관일 뿐이다.


긴 복도의 레스토랑을 걷다 호텔 미로로 접어든 ‘나’는 바닥이 없는 계곡 속으로 떨어지고 목구멍은 말라버린다. 어디선가 단내가 나는 우유 냄새가 나더니 혀넙치가 입안으로 들어왔고 혀와 유희하더니 혀를 삼켜버렸다. 이후 등장하는 일련의 상황들도 서사를 쌓아간다고 하기엔 어딘지 맥락이 없다. 이미 한 달 전 까맣게 불타 버린 여성의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오고, 몸에 돋아난 비늘을 갖고 서커스단에 들어간다.


이 모든 내용은 소설 전개라기보다는 개연성이라고는 없는 꿈에 가깝다.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악몽과도 같은 이야기 속에서 ‘나’는 불안해하지 않는다. 혀를 찾으러 다니지도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에 의구심을 갖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신은 사실 통역관이 아니고, 타이피스트라고. 사진 모델도 절대로 아니고 오직 투명한 관일 뿐이라고 마침내 자신을 재정의한다.


혀를 잃는 행위는 곧 나를 지배하고 있던 언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내 세계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구성된다는 발상이다. 일본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한다는 점에서 이미 ‘나’는 자신을 지배하는 모국어에서 탈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어를 배웠다고 해서 그게 새로운 세계에서 주체가 될 수는 없었다. 독일이라는 나라에 온 ‘나’가 가진 동양인으로서의 피부색은 서양과 동양의 경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크산더라는 자신의 연인이자 독일어 선생님에게 언어를 배우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내뱉는 말을 그대로 따라는 과정은 이후에 통역사로 겪은 일과도 같다. 내 단어가 아닌 단어를 사고를 거치지 않고 말한다. 달을 쳐다보며 ‘이것은 해입니다.’를 말해도 ‘저것은 달입니다’로 답할 수 없다. 그저 크산더가 말하는 대로 따라 말하며 배우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책 앞 페이지에 나온 <이인칭 나>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결국 독일어도 ‘나’에겐 구원이 아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얻게 되는 모국어, 말 따라하기로 배운 수동적인 외국어에서도 벗어나고자 한다. ‘나’가 결국 구원된 순간은 모순적이게도 혀를 잃은 시점부터이다. 언어 체계를 기억하고 있고 그 발음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혀는 알고 있다. 그런 혀를 잃었기에 낯설어지고 새로워질 수 있었다.


어쩌면 혀를 잃어버린 건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잃어버리고 싶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혀가 부재한 곳엔 이야기들이 성큼 들어오기 시작한다. 기묘한 여인 그리고 서커스, 민담까지. ‘나’는 이 이야기들을 그저 담아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느릿느릿 말을 하고자 입을 오므릴 ‘나’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나’의 입에서 나올 언어는 어떻게 구성될까.


책을 읽으며 현실 속 나의, 혀는 입안에 잘 안착해 있는지가 신경 쓰였다. 혹시 소설 속에서처럼 도망칠 생각이라도 하면 그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혀를 이리저리 굴려보았지만, 이미 제 자리를 알고 있는 혀는 조금씩 움직일 뿐 도망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 혀는 너무도 굳어있었다. 혀 표면을 덮은 점막과 더불어 나라는 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국적, 성별, 나이, 출생지와 가족이라는 요소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너무 무거워져 버린 혀는 굳어 버렸다. 혀를 생각하며 다시 목욕탕 속 주인공을 떠올렸다. 주인공도 역시 무거워지고 둔감해지는 혀를 느꼈을까. 다시 혀를 통해 들어오는 여러 감각에 충실해지고자 혀가 도망가도록 두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자신이 혀를 도망가도록 내쫓았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주인공인 ‘나’는 자신이 속한 세계를 재정의할 수 있었다. 국적, 성별, 나이, 출생지와 가족, 이미 너무도 익숙한 체계에서 벗어나 마침내 투명한 관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제 거울 속엔 이전의 주인공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자신만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정의 내릴 수 있다. 책을 읽을 독자들의 혀에게도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도망가- 도망가- 라며.


그렇다면 나는 혀를 내보낼 시기가 된 걸까. 낯설어질 용기는 있을까. 자아 찾기라는 거대한 여정에서 필요한 준비는 딱 하나이다. 삶 속으로 내던져질 준비이다. 그거라면 이미 태어나는 동시에 경험해 봤으니 두려울 것 없다. 낯설어져야만 하는 세계에 나는, 우리는 스스로 또 내던져지기를 택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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