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우리 반에는 민아라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세 살 때부터 우리 어린이집에 다닌 민아는 헬로 키티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아이였다. 외모만 키티 고양이를 닮은 게 아니었다. 민아 부모님이 고양이를 좋아하셔서 민아는 집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외동이었던 민아는 고양이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내가 민아와 지낼 때 민아는 일곱 살이었다. 민아는 고양이 역할놀이를 즐겨했다. 손을 고양이 발처럼 오므리고 입으로 밥 먹는 시늉을 냈다. 친구들이 부르면 "야옹~" 하며 대답했다. 허리에 끈을 묶고 산책을 하는 놀이도 했다. 민아의 그림에는 주로 고양이가 등장했는데, 그림을 잘 그렸던 민아의 고양이에는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친구들은 민아의 고양이 그림을 부러워했다.
민아는 말투도 달랐다. "했어요"가 아니라 "했다옹", "그랬어요" 대신에 "그랬다냥"이라고 말했다. 무릎에 올라앉는 고양이처럼 내 무릎에 와서 얼굴을 기대기도 했다. 내가 고양이인 척 민아를 쓰다듬으면, 민아는 갸르릉거리는 흉내를 냈다. 민아네 고양이는 그리 순한 녀석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민아는 가끔 발톱을 세우고 날카롭게 야옹거렸다. 실제로 고양이가 자기를 할퀸 적이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하루 중 긴 시간 동안 민아는 고양이였다. 나는 조금 겁이 났다. 민아가 자신이 고양이일 때 더 귀여움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자기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을 익혀가야 하는데, '야옹~'이나 '하앍' 같은 소리나 몸짓으로 대신하면 어떡하지? 그저 놀이에 몰입한 것뿐이라고,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양이에 빙의되어 고양이화(化)되어 있는 민아를 종종 최면에서 깨웠다.
"민아야, 민아는 고양이일 때보다 사람 민아일 때가 더 귀여워. 고양이 말 대신에 사람 말로 해줘."
민아가 고양이가 되어 노는 것처럼, 우리 가을이는 사람처럼 노는 놀이를 한다. 사람은 고양이놀이를 하고, 고양이는 사람놀이를 한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사람으로 치면 갱년기는 훨씬 더 지났을 가을이는 대체로 이 집 안주인(=나) 역할을 자주 하는 것 같다.
다들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분주히 다니는 것, 이유 없이 하악대면서 짜증을 부리는 것, 늘어진 뱃살을 출렁거리며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니는 것, 대왕대비마마처럼 버티고 앉아서 가소로운 표정으로 다른 고양이들의 재롱(?)을 감상하는 것 등. 내가 할 법한 행동들을 자주 한다.
나 말고도 가을이는 돌아가신 시어머니 역할도 자주 시전한다.
어머니는 시력이 별로 좋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넘어지실까 봐 발을 끌듯이 걸으셨는데, 그럴 때면 '스윽스윽' 하는 소리가 났다. 싱크대에 수돗물을 틀어 놓았다든가, 텔레비전 볼륨이 올려 있으면 어머니가 다가오시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가을이도 그렇게 다가와서 나를 빤히 보곤 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장은 내가 봐 왔지만 채소를 다듬는다든가 김치를 담그는 일처럼 손이 가는 부엌일은 어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소일거리 삼아 천천히 야채를 다듬으셨다. 얼마 전, 김장을 하려고 파와 쪽파, 갓 등을 사 왔더니, '시어머니 놀이'를 하고 있는 가을이가 와서 참견을 한다. 싱싱한 것을 사 오기는 했는지, 분량이 적당한지 일일이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면서 검수를 한다. 가을이가 시어머니로 빙의된 게 틀림없다.
시어머니처럼 김장거리 검수를 하시는 가을이. 쟤 지금은 시어머니다.
나 아닌 어떤 존재를 사랑하거나 관심을 갖게 되면, 그가 걸어 놓은 최면에 기꺼이 빠지게 된다. 내가 고양이인가 고양이가 나인가, 민아처럼 '냥접지몽'도 꾼다. 밥을 잘 얻어먹고 잠자리도 편안한 고양이들은 내가 집사인가 집사가 나인가, 하면서 '인접지몽'을 꿀지도 모르겠다. 그들이면 충분히 가능한 가정이라는 데 한 표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