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를 키울 때는 병원에 자주 다녔다. 한밤중 응급실도 여러 번 갔다. 아이가 유독 약하게 태어났던 것은 아니다. 아기 키우는 초보엄마들에게 경전과도 같았던, 백과사전 두께의 육아서 [삐뽀삐뽀 119]를 고시공부하듯이 끼고 살아도 아이가 아프면 눈에 뵈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업고 뛰었다.
한 번은 고열이 올라서 한밤중에 근처에 있던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젊은 의사는 잠깐 보더니 아이 옷을 다 벗기고 물수건으로 닦아주라는 처방만 주고 가 버렸다.
'아기 안 키워봐서 저러지. 인턴인지 레지던튼지 젊디 젊은 의사가 뭘 알겠어.'
치료다운 치료를 해주지 않은 병원 측의 태도가 괘씸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새벽동이 터올 무렵 아이의 열은 내렸다.
첫 아이를 소아과로, 이비인후과로, 정형외과로 업고 뛰기를 몇 년. [삐뽀삐뽀 119]는 종잇장이 해지도록 들춰봤으니, 전문의까지는 아니어도 이론과 실습을 거친 의과대학 학부생 정도의 실력은 갖추었다고 자부해도 되겠다.
다들 둘째 아이는 거저 크는 것 같다고 한다. 셋째를 낳으면 맏이가 반은 키워준다는데, 그건 경험이 없어 모르겠지만, 나도 둘째 아이를 키울 때는 한결 여유로웠다. 노련한 간호사처럼 어지간한 열은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내리고, 원인 모르는 울음에도 차분히 대처하면서.
'첫 아이'여서, 처음이어서 어려웠던 거다. 우리에게 온 첫 번째 아이. 그 아이도 이 세상에 온 게 처음이겠지만, 우리도 부모가 된 게 처음이었다. 나이만 먹었지 육아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우리가 부모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들은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우리가 부모로 성장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동안, 아이는 우리를 기다려 주었다. 자기 몫의 아픔을 말없이 감당하면서.
고양이라고 다를까. 가을이를 처음 데리고 왔을 때 우리는 초짜 집사였다. 육아는 초짜라고 해도 아기 낳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기를 맞아들였다. 아기 침대도 사고, 기저귀도 동대문 시장에서 천을 끊어다 직접 만들어 두었다. 세상 비싼 디럭스 유모차도 사서 현관 안쪽에 고이 모셔두고 아기 낳을 날을 기다렸더랬다. 물론 그런 아기용품들이 우리를 부모로 만들어 준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식구를 맞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와 준비는 필요했다. 그러나 아기는 그런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세상에 오듯이, 아들내미도 고양이 한 마리를 그렇게 덜컥 데리고 들어왔다.
그 녀석이 우리 집 삼냥이 중 최고참인 가을이다. 삼색이치고는 흔치 않은 호피무늬를 띠고 있다. 딸내미가 이름을 '타이거'로 하자고 했으나, 9월 말 경 우리 집에 왔으니 그냥 가을이라고 하자고 했다. 딸내미 의견대로 타이거라고 했으면 가을이는 성품이 꽤 포악한 고양이가 되었을 거라는 느낌적 느낌.
가을이 아깽이 시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별로 이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내가 가르치고 있던 던 방과 후 아이들이 아기고양이를 보고 싶다고 할 때면, 나는 가을이를 상자에 넣어 방과 후로 데리고 갔다. 늦둥이 자랑하듯 새 식구를 뽐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었다. 아이들은 예쁘다고 감탄했다. 가을이를 안고 만지며 놀고 싶어 했지만, 상자에서 튀어나온 가을이는 구석으로만 숨어 들어갔다. 그땐 그저 가을이가 좀 소심하다고만 생각했다.
집에서 가을이는 벽지를 뜯었다. 당시 우리 집은 전세 기한이 다 되어 가서 중개사와 집주인이 자주 드나들었다. 나는 주인이 올 때면 가을이가 뜯어놓은 벽지를 가리고 서 있었다. 도배를 해주고 가야 할지 모른다고 가을이를 야단쳤지만 가을이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기한이 만료되어 집을 비워주어야 했는데, 새로 들어갈 집에 입주하려면 7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그동안 월세를 얻어 지내기로 했다. 투룸을 얻어 방 한 칸에는 모든 짐을 몰아넣었고, 네 식구가 단칸방에 모여 잤다. 고등학생인 아들도, 초등학생인 딸도 좁고 힘든 상황을 잘 받아들여 주었다. 불만을 가장 큰소리로 표현했던 건 가을이었다.
가을이는 월셋집 벽지를 또 뜯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강렬하고 집요하게 뜯었다. 벽지뿐 아니었다. 새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 수납해 둔 종이박스들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발정기가 온 가을이는 집이 떠나가라 울었다. 낮에도 밤에도, 잠도 안 자고 참으로 맹렬하게 울어댔다.
드디어 이사하는 날이 되었다. 이삿짐을 다 내리고 문을 닫을 수 있을 때까지, 가을이는 이동장에 옮겨진 채 거의 하루종일 차에 갇혀 있었다. 이사를 하자마자 추석 명절이 이어졌다. 우리는 짐도 풀지 못한 채 2박 3일 일정으로 친정에 갔다. 친정아버지를 돌봐주던 간병인이 명절을 쇠러 가려면 우리 식구들이 가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두 밤을 자고 내려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경악했다. 가을이가 죽어가고 있었다. 눈도 못 뜨고, 불러도 일어나지 못했다. 집 곳곳에 똥오줌을 묻혀 놓았고 항문이 거의 열려 있었다. 명절 마지막날이라 동물병원이 열었는지부터 검색했다. 하루를 더 자고 왔다거나, 조금 더 늦게 돌아왔다면 가을이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가을이는 응급 치료를 받고 회복되었고 차츰 건강을 되찾았다.
이 글을 쓰며, 우리, 특히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동네아이들이 예뻐한다고 익숙하지 않은 방과 후를 데리고 간 것부터, 뜯고 물고 번식하겠다는 기본적인 본능도 인정해 주지 않은 것까지. 의도치는 않았으나 학대에 가까웠다. 종이박스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새로 이사한 낯선 곳에 던져놓은 채 며칠씩이나 집을 비운 비정한 것들이 바로 나였고, 우리 식구들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고 변명해 보지만, '모르는 게 죄'라지 않는가. 그때 만약 가을이가 죽었더라면 그 후 얼마나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을까.
사람이든 동물이든 생명은 단 하나다. "몰라서 그랬어. 다신 안 그럴게."라는 말로 퉁치기에, 생명의 무게는 그 자체로 너무 무겁다.
요즘도 가끔은 여행을 가고 집을 비울 때가 있다. 온 식구가 함께 여행을 가거나 밤늦게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면 우리 집 공식집사인 남편이 가장 분주하다. 세 마리 고양이의 취향과 습관을 고려하여, 화장실을 안으로 들여놓아주기도 하고, 밥도 넉넉히 채워준다. 그들 사이에 공연한 분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날의 컨디션을 살펴가며 격리를 해두기도 한다.
경치 좋은 풍광을 보면서도, 맛집 투어를 하면서도 우리 식구들 마음 한 조각은 그 녀석들 곁에 종종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