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집에 고양이를 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던 말. 이 말이 지금도 유행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우리 집에 고양이를 세 마리 키운다고 말하면, 대개 그들은 "좋겠다. 나만 고양이 없어."라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고양이를 비롯하여 털 날리는 동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나를 꽤 이상한 사람, 약간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거기에 더해, 내가 고양이 걱정되어 여행은 길게 못 간다, 제때에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못 참고 이불 위에 똥을 싼다, 비싸게 주고 산 소파 가죽은 이미 아작이 났다,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를 전하면, 대개 혀를 차며 한심스러워한다. 말로 하진 않아도, '뭘 그렇게까지 하고 사느냐'는 거지.
나도 그랬다. 아들내미의 어린이집 동창 아이 집에서는 고양이를 일곱 마리나 키웠다. 그 집도 처음에는 한 마리부터 시작했는데, 아이 엄마가 워낙 좋아하다 보니 한 마리 두 마리 들이다그렇게 됐다고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때가 대략 십 년 전쯤인데, 그때 일곱 마리였으니 그 후로 더 많아졌는지 적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집에 처음 갔을 때 고양이 양로원 같은 모습에 기함을 했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커다란 몸집의 고양이들이 집안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 집에 있던 고양이들은 길에서 자주 보지 못하던 품종묘였는데, 하나같이 어찌나 거만한지 사람 보기를 우습게 아는 것 같았다. 나는 겉으로 "와, 대단해요."라고 감탄했지만, 이 말의 속뜻은 '와, 당신들 미쳤구려.'였다.
고양이를 대하는 태도에 반전이 있었던 사람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간병인과 함께 지내던 아버지는 삼십 년 넘게 사신 단독주택을 떠나기 싫어하셨다. 주택이 크든 작든 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일일이 손이 가야 하는데, 반신불수의 여든 노인네가 혼자 살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집 곳곳에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폐허처럼 버려진 공간들이 있었다. 물탱크 뒤든 잡동사니를 쌓아놓던 창고 구석이든, 비가 들이치지 않는 곳은 동네 길냥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간병인이 있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사료도 놓아주었다. 아버지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고양이를 고양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늘 '저 놈의 괭이새끼들, 도둑괭이들'이었다. 어쩌다 아버지 눈에 띌라치면 아버지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간병인에게 밥을 주지 말라고 하셨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때는 간병인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하루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생활하셨는데, 그 자리에서는 현관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에 갔더니 현관문이 열려 있고 현관 안쪽으로 사료그릇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보면 사달이 날 텐데, 하고 걱정하며 들어갔다. 아버지는 조금은 겸연쩍은 듯 "괭이가 자꾸 집으로 들어와. 괭이가 집에 찾아 들어오면 복을 물어온다고 해서..."라며 말끝을 흐리셨다. 아버지에게 복은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싫어하던 괭이에게까지 기대볼 만큼 간절하게 바랐던 복은 무엇이었을까.
한때는 '도둑고양이'라는 미운털이 박혔던 길냥이들은 현재 반려동물로 진화하는 과정을 겪는 중이다. 얼음보다 차가운 아버지의 마음을 바꾼 사례만 봐도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책의 제목처럼 야생을 버리고 인간의 곁에 다정한 존재로 살아남기를 택한 고양이들의 선택은 탁월해 보인다. 공연히 와서 다리에 문대거나, 새초롬한 눈빛으로 먹이를 기다리고, 무릎 위에 앉아 갸르릉거리지 않아도 길냥이들의 신분은 꽤 상승했다. 적어도 그들을 '밖에서 사는, 아직 돌보아줄 사람친구를 만나지 못한' 귀여운 종족으로 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코로나로 입원하시게 된 날, 간병인도 짐을 꾸려 떠났다. 아버지는 집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장례를 마치고 빈집에 와서 군색한 살림살이들을 정리했다. 그날, 집안 곳곳을 살피는데 물탱크 뒤쪽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아버지가 가신 날보다 먼저 갔는지 이미 부패가 시작된 고양이였다. 나는 파리가 꼬인 시체를 삽으로 떠다가 마당 한쪽에 묻어주었다.그리 흉해 보이지도 않았다. 죽음은 거기서 거기였다. 사람이나 고양이나 다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생각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다. 겨울이 되면 길냥이들의 삶은 더 신산해질 것이다. 물을 찾아, 밥을 찾아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질 테지. 깨끗한 물을 구하기 어려운지라 타는 목을 축일 수 있게 차라리 눈이 오기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땡땡 얼어붙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질 수밖에 없을 테다, 도둑고양이라는 오명을 감수하며. 길 위의 삶을 버티지 못하는 많은 생명들은 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동네의 어느 후미진 구석에서 생을 등질 것이다.
내가 동네의 모든 길냥이를 책임질 수 없으며, 안쓰럽고 따뜻한 시선을 주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며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 버넷사 우즈/ 300쪽)이었다고 하니, 길냥이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은 내가 사람으로 진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