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세 마리와 털을 비비며 산 지 어느새 십 년이 가까워온다. 한솥밥을 먹지는 않지만 가족처럼 살아온 지 이 정도 됐으면 고양이에 대해서 얼추 알 만한 세월일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고양이들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얘네들이 사람 말을 할 줄 모르는 데다, 얼굴에 근육이 발달하지 않아 표정으로도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꼬리를 물음표처럼 세우면 반갑다는 뜻이요, 엉덩이를 들이대면서 갸르릉대면 만져달라는 뜻이라고 하더라. 그러나 왜 구멍은 파놓고 똥은 그 옆에 싸는지, 왜 자기 오줌을 굳이 밟고 들어와야 하는지, 언제까지 남의 밥그릇을 호시탐탐 넘볼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녀석들은 도무지 교육이 안 된다. 그렇지만 그게 이상한 건 아니다. 나는 가끔 하는 짓이 동물스러워도 '사람과'에 속한 사람이고, 그들은 아무리 사람스러워도 '고양잇과'에 속한 고양이. 우리는 엄연히 종족이 다르니까, 알다가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는, 왜?
같은 '사람과'에 속한 종족이고, 한솥밥을 먹었고, 인간의 말도 하고, 25년 넘게 털을 비비며 살아온, 우리 집 고양이 집사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인가? 나는 오늘 내 아이들에게서는 '아빠'라고 불리는, 우리 집 고양이 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부엌살림이라는 것이 한번 사면 깨져서 못 쓰게 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사용하게 된다. 나는 큰맘 먹고 짝짝이가 되어 버린 수저는 싹 치우고, 옻칠을 한 나무 수저를 세트로 개비했다. 그런데 수저통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던 스텐 숟가락 하나가 미운오리새끼처럼 들어 있었다. 요즘은 식당에서도 잘 내놓지 않는 막숟가락으로, 시골 경로당에서나 찾아보려면 볼 수 있을까 한 것이다. '버릴까?' 하다가 꼬막 껍데기를 분리하거나 생강 껍질을 긁어 까는 데는 그것만큼 잘 되는 게 없어서 하나를 남겨두었는데, 우리 집 집사는 그 숟가락을 애용한다. 가볍고 고급진 새 나무 수저는 내버려 두고, 굳이.
이렇게 쓰면 혹자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는 거지,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막수저로 밥을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다. 나도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는 막수저로 밥을 먹으면서, 고양이 밥그릇은 내가 잘 보관해 둔 스테인리스 그릇을 꺼내준다. 그 그릇이 어떤 것인가? 스테인리스 304 재질에 무게도 가벼워서 마음에 들었지만, 생각보다 고가여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여러 번 한 끝에 질렀던 그릇 아니었던가. 내게는 캠핑용이어서 일 년에 몇 번 사용하지 않아 잘 보관해 둔 그릇들이지만, 집사에게는 '이제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그릇'이었나 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 밥그릇은 환경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도자기나 나무 그릇을 사용하지만, 고양이 밥그릇은 간짜장 한 번만 시켜 먹으면 해결된다고(=간짜장 소스 담는 작은 플라스틱 그릇은 사료그릇, 면이 담겨 오는 넓은 그릇은 물그릇이면 안성맞춤!)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자기는 버리려고 했던 후진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면서 고양이들한테는 고급 그릇에 사료를 진상하는 사람,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뿐 아니다. 이 글의 대문 사진을 자세히 보시라. 초록과 빨강의 체크무늬 사이사이에 금사가 박힌 저 천은 딱 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나지 않는가? 나는 저 테이블보를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상차림을 하겠다고 장롱 안에 넣어두었더랬다. 물론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크리스마스에 저 테이블보를 깔고 케이크와 와인, 촛불로 크리스마스 상차림을 했던 적은 없다.
어느 날, 나한테 물어보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기는 하다.
"여보~?? 장롱 속에 있던 천 그거, 당신 안 쓰는 거지? 나 써도 돼?"
무슨 천인지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수다. 남편이 쓰겠다는 천이 설마 아껴둔 테이블보일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남편이 쓰겠다는데 쓰지 말라고 하지는 못했을 테다. 하지만 그 천을 가져다 고양이 화장실을 가리는 커튼으로 쓸 줄이야.
'분명히 당신 써도 되는지 물었지, 고양이들한테 줘도 되느냐고는 안 물었잖아!' 뒤늦은 후회를 한다.
우리 고양이들도 자기들한테라면 장기라도 떼어 바칠 것 같은 집사의 애틋한 사랑을 너무나 잘 아는 듯하다. 고양이들과 집사는 혼연일체다. 집사가 냉장고 앞에만 와도 세 마리의 고양이는 자기네 밥시간인 줄 알고 모여든다. 자다가도 귀신같이 듣고 온다.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상관없이, 집사가 가는 곳에는 고양이들이 있다.
택배가 도착하면, 내용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박스만 탐을 내는 것도 집사와 고양이의 공통점이다. 집사는 사랑하는 고양이들을 위해 동네에 버려져 있던 2층 침대 사다리를 가져다가 캣 타워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의자를 엎어서 숨숨집도 만들어 주었다. 바람이 들어오지 말라고 아들내미가 전역하면서 남긴 국방색 티셔츠를 씌워놓기도 했다. 보일러를 깔아주지 않은 게 다행이다.
집사의 오지랖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산책을 다니며 어지간한 동네 고양이들하고는 안면을 다 텄다. 어느 집 담벼락에 사는 무슨 색 어떤 고양이들이 몇 시에 산책을 나오는지, 그 고양이들한테 캔을 따주는 캣맘은 누구인지, 어느 고양이가 발정기가 되어 가는지, 줄줄이 꿰고 있다. 만약에 동네에 사는 고양이들을 다 모아놓고 투표한다면, 우리 집 집사가 대통령으로 뽑힐 거라 나는 확신한다.
'고양이에 진심인 사람.'
집사를 이렇게 간단히 정의 내리기에는 다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그는 가끔 고양이들을 이런 말로 야단친다.
"너희들, 도대체 하는 게 뭐야? 하루종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것밖에 더 해?"
그럼, 고양이에게 뭘 기대하는 걸까? 고양이가 자기가 흘린 털뭉치라도 청소하고, 스스로 발톱이라도 깎고, 밥이라도 해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또 가끔 이런 이상한(?) 짓도 한다.
밥을 먹다가 레몬이나 김치처럼 고양이가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음식물을 고양이 코 앞에 들이댄다. 고양이가 킁킁거리다가 가 버리면 배를 잡고 웃는다. 또 비닐봉지를 바닥에 열어두고 고양이가 들어가는 걸 보고는 냉큼 집어 올린다. 비닐봉지 안에서 액체가 된 고양이를 보고는 또 자지러지게 웃는다. 고양이와 놀아주는 거라면서 고양이를 들어 올린 채 뱅글뱅글 돈다. 그러곤 내려놓으며 자기가 먼저 쓰러진다.
나는 집사가 전생에 고양이였거나 혹은 사람의 탈을 쓰고 고양이 왕국을 건설하려고 온 고양이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남들보다 유난히 몸에 털이 많은 것도 이런 합리적 의심에 힘을 더한다. 이런 의심이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이미 그와 사반세기를 함께 살았으니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집사가 나 몰래 고양이들을 호적에 올리고 재산을 상속해주지 않는지 지켜보는 일이다. 세 마리의 고양이 중에서 그가 유독 편애하는 '막내' 고양이에게 상속지분을 더 많이 주지 않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공평하지 않은 일을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 집 고양이 뒤치다꺼리는 계속 이 집사에게 맡길 예정이다. 나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아니 고양이를 예뻐해주기나 하고 이렇게 글이나 쓰면 된다.
한 끼를 먹어도 고급진 그릇에 먹어라? 배부르게 먹고 잘 자는 집사의 최애묘 막내.
집사의 발 하나씩을 사이좋게 차지하고 자는 녀석들. 집사도 따뜻한 발난로 같다고 좋아한다. 어련하시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