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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이가 돌아왔다

소소한 돌봄의 손길 덕분에 길냥이들은 살아간다

by 글방구리

깻잎이가 돌아왔다. 어릴적부터 줄곧 붙어다니던 이모냥, 젖소와 함께 다시 우리 베란다로 들어왔다. 삼색이 쓰리쓰리의 어린 자녀들이 떠난 자리를 한동안 쓰리쓰리의 엄마묘가 채우더니, 깻잎이와 젖소가 돌아옴으로써 다시 새로운 카르텔이 형성되었다.


깻잎이는 아직은 우리 동네에서 짱 먹는 수컷 대장냥이다. 며칠 전에 가끔 드나들던 치즈냥이 베란다 근처를 맴돌다 깻잎이와 크게 한판 붙었는데, 깻잎이가 이겼는지 그후 치즈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날 둘이 으르렁거리며 싸울 때, 나는 솔직히 깻잎이 편을 들었다. 집사가 나와서 "그냥 내버려 둬. 자기들끼리 해결하게."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치즈냥을 향해 돌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쓰리쓰리는 아부를 잘하는 건지 친화력이 좋은 건지, 안면이 별로 없었을 깻잎이와 젖소 사이에 끼어 지낸다. 쓰리쓰리의 친정엄마도 가끔은 밥을 먹으러 오는데, 암컷이라 그런지 깻잎이가 눈감아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덩치가 커다란 성묘가 네 마리. 그들의 밥을 챙겨주는 우리집 집사만 일이 늘었다.

한번에 와서 먹으면 좋은데 이 놈들이 시간차를 두고 오니, 한 끼니도 여러 번 나눠주게 된다나. 하교 시간, 퇴근 시간에 맞춰 식구들의 밥상을 여러 번 차려야 하는 주부의 고충을 호소하던 집사는 밥상 차릴 때마다 눈치없이 고개를 들이밀던 쓰리쓰리에게 결국 한소리 하고 말았다.

"야! 너는 이제 그만 좀 X먹어! 아까도 먹고, 또 먹고. 벌써 몇 번째야?"


깻잎이는 우리 베란다에서 처음 새끼를 낳은 '발랄이'의 아들이다. 발랄이가 낳은 네 마리 중에 가장 건장하게 자랐다. 어릴 때 집사의 차 안에 숨어들었다가 본의아니게 실종되었던 독특한 경험이 있다. 집사가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고 몇 날 며칠 잠복한 끝에 다시 엄마냥에게 데려다 준 까닭에, 집사에게는 남다른 정이 있어 보인다.


사실 집사뿐 아니라,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도 가장 사랑을 받았던 녀석이다.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 아이들은 출근길에 바쁜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깻잎이를 불러댔다. 초등학생들도 하굣길이면 편의점에서 추르를 사다가 바쳤다. 검정과 흰 색 털이 길냥이답지 않게 반짝거리는 이유는 동네 아이들의 코묻는 추르로 영양 보충을 충분히 해서였을 거라고 추정한다. 손에서 손으로, 품에서 품으로. 고양이 발에 흙 묻힐 일 없이 얼마나 안겨 있었던가.


성묘가 되어서도 한참 동안 우리 베란다에 둥지를 틀었던 깻잎이는 어느 날엔가 사료맛집을 후배냥들에게 물려주고 떠났다. 두어 블럭 위에 자리를 잡은 깻잎이는 그곳에서도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우리 식구들이 그 근처로 산책을 나가 마주쳤을 때, 깻잎이는 반갑게 와서 몸을 비볐다. 아들내미는 편의점까지 깻잎이가 따라와서 먼길로 돌아가곤 했다는 후일담을 전한다. 깻잎이 살던 곳도 안정되어 보여 그곳에서 잘 살거라, 했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깻잎이가 아깽이였던 시절, 또 한 마리의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집 녀석들 말고 길냥이들에게는 큰 관심을 주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그 아깽이는 우리 집 앞에서 학원 버스를 기다리던 송현이라는 초등학생의 눈에 띄고 만다. 수백 미터 떨어진 아파트 단지에 살던 송현이는 아침저녁으로 고양이를 보러 왔다. 사료와 추르는 물론, 낚싯대며 담요며 온갖 것들을 다 챙겨 와서는 고양이와 오래 놀다가 갔다. 송현이는 햇볕이 잘 드는 창고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꼬박꼬박 졸기도 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송현이는 아깽이가 춥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송현이가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창고 문을 열어놓기도 하고, 따뜻한 물과 간식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나 수줍음이 많던 송현이는 들어오지도 않고 간식을 먹지도 않았다. 송현이는 아깽이가 크면 만나지 못할 거라는 예감을 했는지, 얼굴에 근심이 깊어갔다.


어미냥이 이소를 하느라, 혹은 먹이를 구하느라 집을 비운 사이에 아깽이를 유괴(냥줍)하는 것은 어미냥에게는 못할 짓이다. 그러나 길냥이들이 길에서 겪어야 할 묘생을 길게 생각해 보면, 적절한 시기에 마음 좋은 집사를 만나 깨끗하고 좋은 환경에서 평생 살아가게 된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닐까.


집사는 송현이에게 아깽이를 데려가 키울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고 했다. 자기는 그러고 싶지만 부모님이 반대를 하셔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단다. 집에 다른 반려동물이 있다고 했는지, 아니면 다른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송현이도 자기가 데려오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 부릴 상황이 아님은 이해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아깽이를 보러 온 송현이 곁에 남자 어른이 서 있었다. 송현이 아빠라고 했다. 송현이가 아깽이 생각에 학교도 안 가려고 해서, 도대체 어떤 고양인지 같이 보러 왔다는 것이다. 해도 뜨기 전부터 고양이를 보러 와서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학교에 갔다가, 하교하기 무섭게 와서는 캄캄해지도록 고양이와 놀다 들어갔던 송현이.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아깽이가 잘 있는지에만 마음이 가 있었고, 급기야 아깽이가 없어질까 봐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데 어느 부모가 걱정이 되지 않으랴.


아빠와 송현이가 함께 며칠 아깽이를 보러 오더니, 드디어 데려가기로 했단다. 집에서 키울 수 없는 사정은 변하지 않아, 아깽이는 조금 떨어진 농장에서 키우는 걸로 아빠와 합의를 했다는 것이다. 날마다 보러 갈 수는 없지만 갑자기 사라져 버릴 걱정은 던 셈이다. 송현이는 그토록 사랑하던 고양이를 데리고 갔다. 그후로는 송현이가 우리집 앞에 오지 않아 아깽이가 어떻게 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송현이도 아깽이도 행복했으리라 믿는다.


"생명체에게는 그 생명체에 특유한 본성이 있다. 물에서 살아야만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을 사막에서 키우면 죽게 되듯이, 생명체는 자기 본성대로 살지 못하면 정상적인 발달이나 성장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생존조차 힘들다. 따라서 어떤 생명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생명체의 본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생명체의 본성이란 어떤 생명체를 바로 그것이게끔 해주는 근본적인 성질이나 속성을 말한다. ... 누군가 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개의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개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도구라서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김태형 [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 167-168)


이 글에 따르면,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고양이의 본성까지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집 막내냥이 내게 안기는 것을 싫어하는데 굳이 끌어안으려고 하는 것도, 늘어지게 자는 고양이를 건드려 깨우는 것도, 영역을 차지하려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것도 그들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본성은 알되 그 본성을 존중하기보다는 내 욕망 충족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자기 돈 들여 사료를 사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중성화 수술을 해주려는 것은 사랑이다. 사료를 밝힌다고 지청구를 줄지언정, 여러 번 차려야 한다고 불평을 할지언정, 너무 많은 개체로 이웃의 눈총을 받지 않게 하려는 우리집 집사의 제한 급식도 사랑이다. 송현이처럼 애틋하게 아껴주고, 끝까지 돌봐주겠다고 마음먹는 것도 사랑이다. 비록 데리고 살지는 않아도 볼 때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는 이웃집 아이들의 손길도 사랑이다.


본성까지 이해하는 거창한 사랑이 아니어도, 이런 소소한 돌봄 덕분에 길냥이들이 오늘도 목숨을 부지하고 산다. 어쩌면 가끔은 행복해할 수도 있다.


밥을 기다리는 쓰리쓰리, 젖소, 깻잎이. 친정엄마까지 오면 좁은 베란다에 발 디딜 틈이 없다.
늠름한 깻잎이지만 졸고 있는 건 얼마나 귀여운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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