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를 살아내면서 인류에게 없던 재주가 하나 생겼다. 코로나 초반에는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주고 줄 서서 샀던 '금스크'였으나, 이후에는 지구 환경을 해치는 대표적 쓰레기가 된 마스크를 오래 착용한 결과, 사람들은 '한 얼굴 두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눈은 자애롭게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욕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양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은 씩 웃을 수 있었다. 반갑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경우에는 마스크를 최대한 끌어올리고 눈을 아래로 깔고, 마치 못 본 척, 지나칠 수 있는 신공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이중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산 지 어언 삼 년. 마스크를 벗으면서 눈과 입이 조응하는 표정을 되찾으려 애쓰는 중이다. 눈이 웃을 땐 입도 웃고, 눈이 울 땐 입도 우는 얼굴. 그리고 가능하면 우는 얼굴, 찡그린 얼굴보다는 웃는 얼굴을 많이 함으로써, 눈가에도 입가에도 웃는 주름이 팬 얼굴로 늙어가고 싶다.
"너, 도대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무조건 야옹밖에는 없어?"
나는 도무지 기분을 알 수 없는 고양이들에게 가끔 이런 불만을 내뱉는다. 그러면 집사는 답한다.
"그거 지금 좋다고 웃는 거잖아."
'웃는 거라고? 저 얼굴이?'
귀가 쫑긋 섰다거나, 꼬리를 발발 떤다거나, 와서 비빈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만 눈과 입이 있는 얼굴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고양이 얼굴에는 웃는 근육이 없다. 잘은 몰라도 우는 근육도 없을 게다. 눈동자의 크기가 작아진다든지, 이빨을 드러낸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기는 해도, 반달눈이 된다든가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우리 냥이들만 안 되고, 다른 집 고양이들은 가능한 건가?
검색 엔진을 돌려보니 가을이는 대략 50대, 메이는 40대, 막내도 30대를 지났다.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아들내미를 봐도, 10대 후반인 딸내미를 봐도, 열 살 넘어가면귀엽다고 할 나이는 아니다. 내 자식들도 그럴진대, 제일 어린 것이 30대 중반을 넘긴 고양이들이 귀여울 리가 있나. 그런데도 우리 식구들은 이 나이 든 고양이들을 매우 귀여워한다. 걸어 다닐 때마다 뱃살이 출렁거리는 가을이도, 한번 잠에 곯아떨어지면 세상 귀찮아하는 메이도 중년이지만, 귀.엽.다. 청년을 훌쩍 넘기고 중년을 향해 가는 막내는 얼굴은 크고 다리는 짧은 신체적 특징과 최강 동안 덕분에, 더, 더, 더 귀.엽.다.
'나도 얼굴에 주름이 없으면 귀여...울...까?'
늙어도 늙은 표가 나지는 않겠지. 그럼 조금 귀여울 수도? 고양이를 잠깐 부러워하다가, 마음을 고쳐먹는다.
에라 아니다, 나이가 들었으면 얼굴도 같이 늙어 가야지. 나이가 들어도 늙지 않는 얼굴, 늙어도 터질 듯 팽팽한 얼굴은 오히려 몹시 볼썽사납지 않던가. 세월과 함께 주름이 생기는 게 자연스러운 진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버스에서 당당하게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는 것도 주름 덕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