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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게도 뒷배가 있다

새처럼, 청설모처럼, 나무처럼, 아이처럼.

by 글방구리

"집에 고양이 몇 마리 키워요?"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이 종종 묻는다.

"안에서는 세 마리. 밖에는 글쎄?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우와아아아아!"

아이들은 마릿수에 놀라지만, 저 답에는 오류가 있다.

나는 고양이를 키... 않는다, 단 한 마리도.

"안에는 세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고, 밖에 사는 고양이들을 위해 사료를 주면 서너댓 마리의 고양이들이 돌아가면서 밥을 먹고 간다."라고 말하면 모를까.


우리 집에는 나와 남편, 그리고 아들과 딸이 함께 산다. 아들과 딸은 내가 키우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내가 키웠더라면 나는 두 아이의 키를 아담하지 않고 훤칠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딸내미에게는 두 눈에 쌍꺼풀을 만들어 주어, 아침마다 쌍꺼풀 테이프를 붙이느라 애쓰지 않게 하겠다. 아들내미의 피부도 말끔하게 만들어서 여드름 패치를 사는 데 돈을 쓰지 않게 하리라.


아들과 딸을 다시 키운다면, 성격도 조금 바꿨을 수 있다. 소심하면서도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아들내미는 대범하면서 화통하게 구성하고, 예민하기가 크리스털 같은 딸내미는 예술가적인 기질은 존중하되 털털한 부분을 보강하고 싶다.


아이들이 나와 남편의 합심(과 합방)으로 이 세상에 나온 것은 맞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지는 않았다. 즤들이 자란 거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속썩일 때마다 '내가 뭘 잘못 키웠기에?'라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고 밥을 주기는 했다. 아이들의 오줌똥을 치워 주고, 옷을 사서 입혀 주기도 했다. 울면 안아주고 달래주었으며, 다치거나 아파하면 옆에서 보살펴 주기도 했다. 고열로 몸서리를 치던 밤에는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밤을 지새운 적도 있다. 친구관계로 괴로워하거나 진로 문제로 어려워할 때, 고민을 들어주고 내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밥을 씹어 삼키고 소화를 시켜 뼈와 살을 만들고, 세포와 근육을 늘린 것은 내가 아니다. 면역력을 키워 바이러스를 물리친 것도, 다친 곳에 새 살을 돋게 한 것도 내가 아니다. 또래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를 딛고 또 다른 친구를 사귄 것도 내가 해주지 않았다.

삼시세끼 밥을 주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고, 때가 되어 학교에 보내기는 했다. 거기까지 했을 뿐, 내가 키울 수는 없었다. 즤들이 그냥 스스로, 저절로 자랐다. 뒷배는 있었지만.


고양이들도 그렇다. 시간 맞춰 밥을 주고, 춥지 말라고 안에 들여놓아 주고, 화장실을 만들어 주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고양이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 사는 고양이들에게는 안에 들어오라 하지 않고, 똥오줌은 즤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인데, 고양이 어미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글쎄, 어릴 때 그루밍을 직접 해주는 것 정도 더 할 수 있으려나?


숲에 사는 새들도, 청설모도 마찬가지다. 암수는 집을 짓고, 알을 낳고, 품고, 먹이를 물어다 준다. 하늘을 나는 법을 보여주고 천적에게서 지켜주려고 애쓴다. 그렇다고 에미 아비가 키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키울 수 있다면, 어린애 조막만한 붉은머리오목눈이도 자기 새끼를 독수리나 황새처럼 크게 키웠을지 모른다. 나무를 빠르게 오르내리는 청설모는 자기 새끼가 호랑이 만해지도록 도토리 대신 토끼를 잡아먹였을지도.


꽃이라고 다르랴, 나무라고 다르랴. 세상의 어떤 자식도 부모에 의해 키워지지 않는다. 부모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주는 뒷배의 힘으로 자란다.


아이들이 어릴 때면 고열이 아이들을 키우나 싶기도 했다. 옛 어른들은 '아이가 아플 때마다 재주 하나씩 는다'라고 했다. 그 말은 옳았다. 아프고 나면 아이들은 부쩍 자라 있었다.

내가 가르쳐 주고 싶은 것들이 있었지만 아이들의 배움은 주로 친구들과 놀면서 이루어졌다. 그럴 때는 놀이가 아이들을 키운다고 생각했다.


고양이들은 햇볕이, 잠이 키우는 것 같다. 볕이 드는 따뜻한 창가에 앉아 오래오래 자고 일어난 고양이들은 몸을 쭉 펴면서 자기가 이만큼 더 컸다고 보여준다.


이렇게 아이들을, 고양이를, 새와 청설모와 꽃과 나무를 자라게 하는 뒷배는 여러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햇볕으로, 바람으로, 쉼으로, 놀이로, 때로는 아픔과 고통으로. 그 뒷배 덕분에 만물이 자라고 있다. 고양이도, 새도, 청설모도, 아이들도, 그리고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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