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읽기도 어려운,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는, 이 이름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아파트 이름이라는구나. 서울에 있는 아파트 중에서는 개포동의 '디에이치퍼스티어아이파크'라는 곳이라나? 시어머니가 못 찾아오게 일부러 그런 아파트에 산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은 듯하다만.
영주야, 너는 지금도 아파트에 살고 있니?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아파트도, 빌라도 별로 많지 않았지. 친구들 중에 누가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걔네 집은 '부자'요, 빌라에 산다고 하면 걔네 집은 '더 부자'라고 생각했더랬어. 그게 너를 오해했던 까닭이기도 했고.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친구들 집에 몰려다녔는지 모르겠어. 주말마다 이집 저집으로 삼삼오오 놀러 가곤 했지. 정말 친한 친구만 초대한 게 아니라 친하지 않아도 우르르 몰려가곤 했던 것 같아. 지금이야 아이들이 놀러 다닐 데가 많으니까 굳이 집에 가지 않는 경우도 많겠지만, 우리 어릴 때는 그렇게 갈 만한 문화시설이 많지 않았잖아. 그러니 만만한 게 집이었나 봐.
사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아직 어려서 아파트의 평수나 집의 규모, 사는 동네를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부모님들이야 달랐겠지만. 자기 방이 있던 친구도 있고, 언니나 동생과 같이 쓰던 친구도 있었어.
영주, 너와 함께 학교를 다니던 때, 우리 집은 단독주택에 세 들어 살고 있었어. 그 집에는 '식모방'이라고 부엌에 딸린 아주 조그만 방이 있었어. 아마 고시원보다도 작았을 거야. 비키니 옷장이라고 했던가, 알록달록한 비닐 옷장과 앉은뱅이책상 하나를 두면 이부자리 펴기도 빠듯했던 크기였지. 그 방이 내 방이었는데, 외할머니가 오시면 그 방을 내드리고 언니와 한 방을 썼어. 그래서 난 외할머니를 더 반기지 않았는지도 몰라.
고등학교 1학년. 서클 활동을 같이 하던 친구들의 집을 거의 다 한 번쯤 돌았을 무렵, 우리는 너희 집에도 가보고 싶어 했어. 네가 아파트에 산다고 했기에 더 궁금해했을 걸? 그러던 어느 날, 너는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했고 우리는 드디어 너희 집을 찾아갔지. 청계천 근처, 황학동이라고 기억해.
일요일이었어. 나랑 또 다른 친구들은 물어물어 너희 집을 찾아갔어. '아파트'라는 말에 왜 나는 고층을 상상했을까? 너희 집이 있던 건물은 4,5층 정도 되었을까, 아파트라기보다는 연립주택에 가까워 보였는데 계단을 숨차게 걸어 올라간 걸로 기억해. 복도형으로 생긴 건물이었고, 촘촘하게 붙어 있던 문들. 우리가 한 줄로 걸어야 할 만큼 복도에는 물건들이 쌓여 있고, 복도의 유리창은 드문드문 깨져 있었던 것도 같아. 지금 생각하니, 너네 아파트는 철거 직전이 아니었나 싶다.
문을 두드리니 너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았지만, 나는 그때 보았어. 네 뒤로 앉아 있던 너희 식구들. 좁은 집에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대여섯 명 앉아 있었고, 집안은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어. 나와 마주친 눈빛만으로도 우리가 불청객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지. 너는 우리더러 들어오라며 반겼지만, 우리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너에게 밖에 나가서 놀자고 했고, 그렇게 너희 집 문은 다시 닫혔어.
그로부터 육칠 년이 지나,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즈음에도 서울 강북의 주택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아. 내가 살던 미아리에도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달동네가 있었지. 주소도 '산 몇 번지'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 동네에 가면 길을 잃지 않으려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단다.
나는 주말이면 산동네에 있던 '**아가방'이라는 곳에 가서 일손을 도왔어. 그 아가방은 이십 대 후반이었던 프란치스카라는 언니가 꾸려가던 곳이었어. 부모가 일을 하는 동안 아기를 봐주는 탁아소였는데, 겨울이면 비닐로 쳐 놓은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언니는 혼자 아기들을 먹이고, 씻기고, 어떤 날은 밤에 데리고 자기도 했어. 마당 한편에 있던 화장실은 당연히 푸세식인데, '똥차'라고 하던 트럭이 산동네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는지 때가 되면 언니가 직접 퍼 날랐어. 그 언니는 어떤 사명감으로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 마치 자기 집처럼, 자기 아이들처럼. 내가 그 동네를 떠나면서 언니 소식도 알 길이 없어졌지만, 난 그 언니야말로 날개 숨긴 천사였음을 확신해.
천사는 어느 동네에 사는지, 무엇을 먹는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로 알아볼 수 없어. 그보다는 굳이 안 해도 되는 남의 일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를 보면 돼.
좁은 곳에서 여럿이 함께 살았던 너희 집, 꼬불꼬불 달동네에 있던 하꼬방.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던 작은 공간들이었지. 그런데 그 후 사십 년이 더 지났는데도 별반 나아졌다고 할 수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 전국 어디를 가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게 되었는데도, 없는 사람은 여전히 없고 가진 사람은 여전히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니.
내가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나라님도 못한다는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나 사느라 바쁘다고 빈곤한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걸잘했다곤 할 수 없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말은 아니니까.
'그 사람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악령이 내뱉는 단골 멘트라고 하더라. 그러니 천사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악령 신세만 면하려고 해도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건데...
영주야,
이제 우리는 너와 알고 지냈던 그 시기의 우리 부모님 나이도 훌쩍 뛰어넘어, 인생의 황혼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슬프지만, 언제 죽어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됐네.
한때는 더 넓은 집, 더 근사한 집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많은 재산을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기도 했어. 그러나 집이 넓으면 내 손으로 쓸고 닦기도 힘들어지고, 재산을 남기는 것이 아이들에게 현명한 유산은 아닐지도 모르겠구나. '집'과 '짐'은 받침 하나 차이일 뿐이니, 내 분수보다 더 큰 집을 소망하면 결국은 짐이 될 수도 있다고도 하고.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시선과 관심과 마음을 더 가지는 것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노후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지만, 악령은 끊임없이 '그래도 노후를 생각해야지, 그래도 넓은 집이 좋지 않겠니, 그래도 많이 물려주는 게 좋지' 하고 꼬드기겠지.
나는 지금 아파트에 살지는 않아. 그러니 정신이 흐릿해진다고 해도 아파트 동호수가 헷갈리거나 이름을 외우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다행인가?
뭐? 나중에 맞을 며느리가 나 못 찾아오게 일부러 그런 아파트에 살면 어떻게 할 거냐고? 며느리고 아들이고, 끝이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