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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녀'라고 알랑가 몰라

일곱 번째 편지 / '시고르자브종'으로 살았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by 글방구리

1988년 3월 1일.

쌍팔년도에 열리는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가 태극기보다 더 많이 보였던 그해, 삼일절. 전국 각지에서 온 23명의 처자가 서울 시내에 있던 모처에 모여, '수련'이라는 첫 발을 내디뎠던 날. 3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워지지도 않고 바래지도 않는 페인트로 그린 듯 선명한 그날, 그 장소. 인옥 자매, 진호 자매도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먼저, 내가 그대들을 '인옥 자매, 진호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양해해 주길 바라. 존댓말을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평어를 사용하는 것도 역시. 우리는 그날 이후 삼 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동기니까 친구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겠나? 단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존경받는 수녀님인 그대들이 지금은 나 같은 평신도로부터 잘 듣지 못하는 호칭일 것 같아 조금 주저되기는 하는구먼.


내 나이 스물다섯이었어. 참 어렸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남녀공학이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던 도시 여자. 학교 다닌다는 핑계와 더불어, 뭘 해도 어리바리하다는 막내라는 특권(?)앞세워, 내 손으로는 밥 한 번, 청소 한 번을 제대로 해본 적 없었던 철딱서니였지. 내 친구 몇몇은 그즈음 결혼을 하기도 했는데, 나는 아마 그때 결혼했다면 소박을 맞았을 게 분명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새롭게 시작한, 끈끈한 동기였지만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어. 그것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일절 묻지 말라는 것. 몇 살인지, 최종학력은 어디까지인지, 전공은 무엇인지, 가족관계는 어떤지도. 서로에게 선입견을 갖지 말고 백지상태인 채로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으라는 뜻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중에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개인 정보가 있었으니, 그것은 '고향'이었어. 각자 자기의 출신 본당은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


인옥 자매와 진호 자매는 충청도 깡촌 출신이었어. 그때까지는 듣도보도 못한 지방 도시였는데, 나중에 인옥 자매가 자기네 집에 전기가 들어온 지 몇 해 안 되었다고 했어. 나도 서울에 살기는 했어도 푸세식 화장실을 쓰고 연탄을 때는 단칸방, 단전과 단수가 자주 일어나던 달동네에도 살아본지라 인옥 자매 말에 흠칫 놀라기는 했어도, 그럴 수 있겠다 생각했어.


진호 자매는 사투리가 유난히 심했지. 진호 자매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씩 웃기만 했는데, 어느 날엔가 사투리를 흉내 내니까 "오메, 누가 사투리를 쓴다 그랴?"라고 화를 내서, 그 순간 모두가 빵 터진 적이 있어. 기억해?


자매들은 자신들이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서만 살았던 나를 세련된 '차도녀'라고 여겼던 것 같아. 뼛속까지 서울 여자였던 나는 '시고르자브종' 강아지처럼 탄탄하고 해맑은 자매들의 삶이 처음에는 한없이 낯설었는데, 그러나 삼 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됐지. 나는 차가운 도시 여자가 아니라, 자연에 대해, 노동에 대해 무지하고 무식한 '무도녀'였다는 것을, 그리고 자매들처럼


흙을 만지고 살아온 삶은,
아니 흙을 바라보기만 했어도
사람의 심성이 흙처럼 겸손해진다는 것을.
풀과 나무와 바람 속에서 뒹굴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플라스틱을 만지며 살아온 사람과는
인성을 이루는 성분이 다르더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촌에서 자라 아는 것이 없다고 했던 자매들의 맑은 영혼이 '자연'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신한 나는 그로부터 십여 년 뒤, 엄마가 되었을 때 자연을 내 육아철학으로 삼게 돼. 아이들은 무조건 자연 속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는. 그래서 공동육아를 만나게 된 거지.


내가 덜떨어진 삶을 살게 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야.


출판사에 다니며 책을 만들었던, 공동육아 부모일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했어. 그런데 길을 바꿔 공동육아 교사가 되고 나니까 그간의 모든 경력이 초기화되더라? 내가 알던 지식은 쓸데없어지고, 자연이니, 생태니, 세시절기니 하는 외계어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어.


콩을 삶아 메주를 빚고, 그렇게 말린 메주로 장을 담글 때는 '말날'에 해야 탈이 없다는, 그런 지식은 어디에서고 배우지 못한 거였어. 그뿐인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는 텃밭 농사며, 정월대보름 달집을 태울 때 쓸 새끼를 꼬는 것, 산에서 주운 도토리를 물에 담가 도토리묵을 만드는 것 등 평생 구경도 해보지 못한 것들을 직접 해야 했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리벙벙해 있으면, 농담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이 바로 날아왔지.

"어머나~ 그것도 몰라요? 처음 해보나 봐요?"


농사를 지어보기는커녕, 짓는 것을 옆에서 본 적도 없이 도시에서만 살았던 것이 내 잘못도 아니고 사실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었음을 이제는 알아. 하지만 초보교사일 때의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 얼굴이 붉어졌어. 내가 부족한 사람,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커서 채워야 할 결핍이 너무 큰 사람처럼 느껴진 거지. 그렇다고 어릴 때 흙 만지는 일을 가르치지 않았던 내 부모를 원망해야 했을까?


내 몸이 유연하지 않아 국선도 체조를 잘하지 못해도 놀림받을 일이 아니었음을, 농사일을 해보지 않고 자랐음이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었음을 몰랐어. 그런 기술들을 알지 못하기에 공동육아 교사로 부적합한 것도 아니고, 유아교육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내 인생 경험으로도 얼마든지 유아교사를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그리 자신 없어했을까.


인옥 자매, 진호 자매.

퇴직을 하고 나니 내 지난 생이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 비슷한 '시고르자브종' 친구들, 동료들과 살았어도 영적인 자매들과 맺은 관계와, 직장에서 동료로 맺은 관계는 서로 달랐다는 것을 말이야.

살았던 곳이 '시고르(시골)'냐, '서우르(서울)'냐는 중요하지 않아.
농사를 지어봤냐, 책을 만들었냐도 부차적인 것 같아.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을 얼마나 존중해 주는가,
다르게 살아온 삶의 궤적을 가감 없이 인정해 주는가 하는 것이지.
그래서 자매들에게 고마워.
무식한 도시 여자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줘서.



벌써 세밑이야. 내일이면 2024년 새 날이 시작되네. 좋은 계획들 세우셨나?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벌써 여러 가지 신년 계획을 세웠지.

내년부터는 파마는 하되 염색은 안 하리라, 재활용 분리배출을 조금 더 확실하게 하리라, 술은 내돈내산 하지 않고 남들이 사줄 때만 먹어야지, 하는 소소한 것들.

그런데 아직 마음에서 왔다 갔다 하는 계획이 하나 있어. 재작년에 하다가 실패한 주말농장이야. 작년에는 바빠서 쉬었는데 올해는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살금살금 올라오네. 밭 한 뙈기 얻어 가꾼다고 무도녀가 시고르자브종 농부로 거듭날 수 있을까는 자신이 없지만, 어떡하지? 할까, 말까?

자매들이 답신으로 알려주면 고맙겠구먼. 그럼 안녕.

농삿일을 잘하던 것도 부러웠지만, 자연을 닮았던 자매들의 심성이 너무나 부러웠어. 이제 와서 텃밭 한 뙈기 가꾼다고 나도 그리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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