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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오시는 날이니까

여섯 번째 편지 / 그 빛 앞에 나를 꺼내놓고 싶어

by 글방구리

다니야.

밤에 쓴 편지는 절대로 부치지 말라고들 하지. 날이 밝은 뒤 다시 보면 후회할 말을 적을 때가 많다고.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거나 또는 이제 그만 헤어지자고 할 때, 용기를 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때나 말로는 하기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할 때도 편지 쓰기는 쉽지 않아.


솔직하고 진정성이 있게 써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끝내 숨기고 싶은 마음을 너무 다 드러내는 건 아닌지, 내가 선택한 단어가 내 마음을 적절하게 표현한 건지 자신이 없을 때가 많더라. 그래서 쓰고 읽고 지우고, 다시 쓰고 읽고 찢어버리고, 그러다가 아예 포기하기도 하고. 어쩌면 편지는 자기 검열이 가장 강한 글쓰기 장르인지도 모르겠어.


다니야.

나는 지난주에 네게 편지를 쓰려고 했어. 그런데 쓰고 읽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노트북을 덮고 말았어. '독자와의 약속'이라는 연재도 펑크를 냈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지만,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만큼 과거의 실수를 돌아보는 게 힘들더라. 네게 끝내 편지를 마무리하지 못하면서 알게 됐어. 내가 네게 저지른 잘못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현재진행형이었다는 것을. 물론 그 대상은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지만 나는 수없이 많은 '다니들'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고, 지금도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옛날에 나는 너와 주일학교 교사를 같이 했어. 너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잘 웃고,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조용조용 다 들어주는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사람, 늘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기도를 많이 했고, 성경 이야기를 하면 작은 눈이 커지면서 반짝거렸던 사람이었어. 그러니 다들 너를 편안해하고 존경에 가까운 마음을 지녔던 것 같아. 나도 겉으로는 다른 교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너를 대했어.


그날은 성탄절을 보내고 난 다음이었어. 우리는 '작은 별 잔치'라는 아이들 성탄 예술제를 무사히 마치고, 송년 파티를 하겠다고 멀리 노량진 수산시장까지 몰려 갔지. 다니, 너는 고기도 생선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당시만 해도 누가 누가 잘 마시나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마셔대던 술도 잘 마시지 않았어. 그러니 그날 횟집 회식이 너를 배려한 선택은 아니었어. 그간 수고했다고 신부님이 한턱을 내겠다는 말씀에 교사들은 평소에 먹지 못한 메뉴를 골랐던 거니까.


갓 잡아 펄떡거리는 생선회가 안주로 올라오고, 분위기는 한껏 흥겨웠어. 술도 안주도 네 취향이 아닌 줄 알고 계셨던 신부님과 언니들은 너를 걱정하며 기본 반찬들을 네 앞으로 밀어주었지. 기분 좋게 술잔이 돌아가고 빈 병 수가 늘어나면서 대화는 점점 걸쭉해졌어. 짓궂은 남자 교사들이 은근슬쩍 음담패설도 던졌지만, 적절한 선에서 끊어주던 언니들이 있어서 웃고 넘길 수 있었어.


그런데 네 비위가 상했던 건 음담패설도, 토막이 났어도 살아 꾸물대던 산낙지 때문이 아니었어. 그때만 해도 우리가 참 유치하고 어렸나 봐. 요즘은 초등학교 저학년들이나 즐길 만한 '똥 이야기'가 화제로 무르익자, 너는 입을 막고 구역질을 했어.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너는 곧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밖에 나가 먹은 것을 다 게웠다고 했어. 뒤따라 나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언니들은 너의 토악질이 똥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는 가장 신나게 얘기를 했던 남자 교사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어. 그 교사는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어안이 벙벙한 듯했으나, 네가 다시 식탁에 돌아왔을 때 네게 미안해하면서 사과를 했어.


다니야, 나는 왜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 일을 35년이나 지나서 네게 고백하고 있을까? 나는 그 사달이 나는 동안, 너를 걱정하지도 않고 너를 따라나가지도 않았어. 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라서 먹은 것도 많지 않았을 네가 얼굴이 하얘져서 자리에 다시 돌아왔을 때,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왜냐고? 나는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비우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지는 똥 안 누고 사냐? 혼자 고상한 척은 다하지. 아주 유난을 떨어요. 싫으면 오질 말던가.'라고.


질투였어.

강퍅하고 날카롭던 나와는 달리 부드럽기만 하던 네 성정, 성녀나 천사에 가깝게 보이던 단단한 신앙심. 내가 갖지 못한, 그러나 매우 갖고 싶었던 것을 갖고 있던 네게 대한 부러움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질투로 타올랐던 거야.

그 질투심이 그날 한 번, 오래전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났다면 나는 이 편지를 쓰는 데 그리 망설이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내 안에 있던 질투심은 마치 뿌리를 다 뽑아내지 못한 잡초가 호시탐탐 고개를 내밀듯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내 삶을 휘둘러 왔어.


혹자는 그러겠지. 질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처럼,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더 갈고닦으며 바뀌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아니, 아니야. 나는 그러지 못했어. 나는 질투하는 나 자신을 숨기려고 상대방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 상대방의 단점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더랬어. 질투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면 되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까지 합세를 하면서 죄의 뿌리를 뽑지 못했던 거야.


죄는 자신을 정직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데서 시작해.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음지에 피었던 곰팡이도 빛 앞에 꺼내놓으면 사라지고 말 텐데.
고해성사가 그런 거겠지, 빛 앞에 꺼내놓는 것.
오늘은 그 빛이 사람으로 오시는 날이고.


다니야, 너와 나는 그 후 평생 다른 삶을 살았으나 노년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은 비슷하구나. 너는 지금도 예전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열심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지. 나도 여전히 강퍅하고 날카롭고 차갑지만, 너를 질투했다는 말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는 생겼단다. 내 성격보다는 아직도 네 성격이 더 좋아 보일 때도 있지만, 이제는 너를 질투하기보다는 내게 이런 성격을 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었나 찾으려고 해. 살면서 질투 때문에 저지른 상처를 치유하기에도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고, 내가 가야 할 발걸음이 너무 바빠서...


다니야,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네. 빛이 오시는 날이야. 오랜만에 흰 눈이 소복하게 와서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하네. 말밥그릇에 뉘어 있는 한 아기, 그분에게서 빛을 볼 수 있는 지혜와 그분 앞에 무릎 꿇어 경배할 수 있는 겸손을 청하는 날이 되고 싶다. 너에게도 그런 축복 가득한 성탄이 되기를 바라. 이만 안녕.


추신: 우리가 다니던 성당에서는 요즘도 작은 별 잔치를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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