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생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다섯번째 편지 / 나도 구천에서 떠돌기는 싫어서

by 글방구리

"친구들에게 이런 덜떨어진 짓을 하고 살았습니다" 하고 공개적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적어도 너한테는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내 오십년지기 친구이고, 지금도 여전히 소식을 전하면서 사는 친구니까 마음속에 묻어놓은 잘못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오래전, 너와 싸우고 한동안 소원하게 지냈던 일이 떠오르더구나. 그 일의 전말에 대해 네게 소상히 얘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오늘 편지에는 그 일을 고백하려 해.


너하고 친해지기 시작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어. 별일 아닌데도 깔깔거리며 웃고, 우스갯소리도 자주 하던 너는 환한 박꽃 같았어. 네 밝은 웃음이 부러웠다는 말이야.

한 해 동안 난 너와 단짝이 되어 붙어 다녔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철이 늦게 들었던 우리는 교복 치맛자락 펄럭거리면서 고무줄놀이도 하고, 눈이 오면 언덕길 썰매도 탔어. 학교에서 붙어 지내는 것으로 모자라 성수동에 있던 너희 집으로, 미아리에 있던 우리 집으로 자주도 놀러 다녔던 기억이 나. 3학년에 올라가서도 같은 반이 되었을 때 우리가 두 손을 붙잡고 콩콩거리며 얼마나 좋아했니.


그러다 그 일은 3학년 2학기 중간고사를 본 뒤에 터졌어. 3학년에 올라와 나는 반장이 됐지. 선생님들은 성적순에 따라 반장을 임명하기도 하고 간혹 투표로 정하기도 했는데, 난 성적이 상위권이기는 해도 1,2등을 맡아놓고 하는 건 아니었어. 그렇다고 인기가 많았던 것도 아니었으니, 이를테면 '어반'(어쩌다 반장)이 된 거지. 1학기까지만 해도 이러구러 성적을 유지해 오기는 했는데, 2학기 중간고사 때는 그야말로 폭망한 거야. 아무리 성적이 좋지 않아도 반에서 5등 아래를 해본 적이 없던 내가 그 시험으로는 13등까지 미끄러져 내렸어. 선생님이 교무실로 부르시더라.


"집에 무슨 일 있니?"

굳은 표정의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말로 상담을 시작하셨지만, 곧 본론을 꺼내셨어.

"너, 반장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와야지. 13등이 뭐야, 13등이?"

손가락으로 통지표를 톡톡 치시면서 훈시를 하던 선생님의 입에서 뜻밖의 말씀이 나왔어.

"너, 아무래도 **이랑 붙어 다니면서 이 꼴이 난 것 같아. **이도 성적이 중간 아래로 떨어졌어.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주지 못하면 친구라고 할 수 있겠어? 너희는 좀 떨어져 지내는 게 좋겠어."

예상대로, **이는 네 이름이야.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내는 게 왜 내 성적과 연결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반박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왔어.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너에게 절교 선언을 했지. 이유를 몰라하는 네게 "넌 너무 이기적인 애야."라는 독한 멘트를 날리며, 둘이 소풍 가서 함께 찍었던 사진을 반으로 쭉 찢어 버렸어. 넌 너의 어떤 모습이 이기적이었는지 말해 달라고 했지만, 난 아무 말이나 둘러댔던 것 같아. 그렇게 절교를 하고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우리는 한 달쯤 후에 울며불며 화해를 했지.


우리 학교는 그래도 명문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는데,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몇몇 선생님들이 있었어. 우리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도 교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 수학 문제를 푸는 아이들에게 다가와 아이들의 어깨에 자신의 신체 부위를 문지르던 능글맞은 수학 교사, 출석부나 대걸레 등 도구를 이용해서 아이들을 마구 때렸던 국어 교사, 화를 참지 못해 아이들을 향해 슬리퍼를 벗어던지던 도덕 교사 등.

지금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 할 폭력이지만, 당시 우리는 선생님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 선생이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우리 담임 선생님 역시 출석부로 머리를 때렸던 선생님만큼이나 잘못했다고 생각해. 나도 그때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 안 되는 거였어. 그건 선생님이 잘못 안 거라고, 내가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떨어진 거지, 친구 탓이 아니라고 진실을 말해야 했어. 너와 손절하기 위해 네게 뒤집어씌워야 할 잘못을 찾고, '너는 이기적이야.'라는 추상적인 죄목을 찾아 들이대며 절교를 선언해서는 안 됐던 거라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라면 사돈의 팔촌까지 먼지 털듯이 털고, 없는 죄목도 만들어 뒤집어 씌우는 무지막지한 행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학교'라는 곳에서 그걸 배우고 있었던 거야. 너무 무섭고 끔찍한 일이지.


부모가 아이를 때리면서 이렇게 말하지. "다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라고.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해. "너희들 잘 되라고 혼내는 거야."라고.

부모가 되어 보고, 선생이 되어 보니 백 중의 아흔아홉은 거짓임을 알겠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때리고, 혼내고, 소리 지르는 거야. 가짜 사랑, 가짜 훈육이지.

마음이 따뜻한데 차가운 말이 나갈 수 없고,
솜방망이로는 찌르는 칼을 만들 수 없어.
사랑은 아수라 백작처럼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단 말이야.

아이들도 다 커서 품을 떠나고, 퇴직까지 한 마당이라 부모와 교사로서 산 세월에 대해 반성문을 쓰기에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어. 그래도 아직 네게는 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어 다행이야.


그리고 우리 담임 선생님도 그땐 너무 어리석고 몰라서 그랬을 거라고 용서해 주자. 그분은 아마 이미 저 세상 분일 텐데, 우리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구천에서 떠도는 영혼이 되지 않겠니.


다음에 만나면 내가 거하게 맛있는 밥을 살게. 이런 얘기를 직접 만나서는 쑥스러워 털어놓지 못할 테니까, 너는 내가 적금 타서 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 조만간 전화할게. 안녕.

keyword
이전 05화금란이는 말고, 금숙이만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