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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항아리가 될 줄 몰랐어

세 번째 편지 / 내게 뚱뚱한 친구가 없는 이유

by 글방구리

딸내미는 일 년 만에 10킬로 이상 살을 뺐단다. 독한 지지배.

고등학교 입학할 때는 77 사이즈도 몸에 끼었는데 지금은 55 사이즈를 사 입어. 가끔 44 사이즈를 사서 몸을 억지로 구겨 넣기도 해. 그러니 입학할 때 산 교복이 맞을 리가 있나. 바지, 치마, 재킷 돌아가면서 한 번씩 수선집에 다녀왔지. 줄이지 않은 것은 셔츠뿐일걸? 셔츠는 등교할 때만 잠깐씩 입나 봐. 집에 올 때는 대개 사복 차림이고 셔츠는 가방 속에 구겨진 채 들어가 있어. 교복은 교문을 통과할 때만 입고 있으면 안 걸린다나? 다른 애들도 다 그런다고 하니 잔소리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수밖에.

입학할 때 큰 맘먹고 셔츠 위에 입을 수 있는 카디건도 사줬더랬어. 봄가을로 따뜻하게 입으라고. 그런데 딸내미는 핏이 안 예쁘다며 2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더라? 옷걸이에만 걸려 있는 게 아까워서 만지작거리면서 내가 말했지.

"이거 니트라 따뜻하고 색깔도 고상한데 넌 왜 안..."

"그럼 엄마가 입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보고 입으란다. 자기는 아예 입을 것 같지 않다고.

'고뤠~? 아싸, 개꿀~!'

냉큼 받아서 교표를 조심스레 떼어내고, 그 자리에 나뭇잎 모양 펜던트를 달았더니 교복이었다는 걸 아무도 모르더라. 신분세탁을 확실히 한 셈이지.


가방 속에서 꾸깃해진 딸내미의 셔츠를 꺼내 다림질하다 보니, 우리가 학창 시절에 입었던 셔츠가 생각나더라. 춘추복과 하복에는 겨울 교복에는 없던 허리띠가 있었지. 우리는 버스에 앉아가는 날에도 셔츠 뒤가 구겨질까 봐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않았어. 허리띠는 최대한 졸라맸고. 허리띠 안에 단단한 심지를 대서 졸라맨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 생각나니? 교문을 들어서는 동시에 허리띠를 풀었지. 딸내미의 셔츠가 교문 통과용이듯이, 우리의 허리띠도 교문을 통과하면 역할이 끝났던 거야.

등교 준비하면서 거울 앞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으면 엄마도 걱정을 했지. 그러다 숨 막혀 죽겠다고. 그러면 나도 엄마한테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아. 다른 애들도 다 그런다고. 그러니 내가 딸내미에게 뭐라 하겠니. 모전녀전, 그 에미에 그 딸인걸.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내내 날씬했어. 아니, 실은 날씬하다기보다는 배배 말라비틀어진 말라깽이에 가까웠지. 가장 작은 치수의 바지를 사도 허리가 커서 흘러내렸으니까. 오빠는 내가 너무 말라서 뼈다귀만 보인다고, 내 이름 대신 나를 "뼉!"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으니 말 다했지 뭐.


"이게 엄마라고?"

"에이, 난 모르는 사람인데?"

그 당시의 사진을 꺼내면 남편도, 자식들도 못 알아봐. 그 안에 있는 젊고 날씬한 처자는 과연 누구란 말이냐. 내가 봐도 내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다 몇 년 동안 제시간에 먹고 자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살이 붙기 시작했어. 아이 낳고 빠지지 않는 살은 나잇살까지 보태면서 풍선처럼 불어나기만 하는구나. 나이 앞자릿수가 5일 때는 몸무게도 5로 시작하더니, 앞자릿수가 6으로 바뀌니까 몸무게도 덩달아 6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야. 예전에 목욕탕에서 할머니들을 보면 항아리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아서, '여기가 어디?목욕탕? 장독대?'라고 했는데, 내 몸도 어느새 된장 항아리, 간장 항아리가 되어 버렸지 뭐냐.


서론이 길었네.

뚱뚱했던 내 친구들아, 향순이, 지화 그리고 또 누구누구들아. 아슴푸레하게 떠오르는 이름들을 불러본다. 너희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 너희를 '뚱뚱했던 친구들'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 기억하려 해. 말라깽이였던 내가 지금은 뚱보할매가 되어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너희들 중 누구누구는 왕년의 뚱보가 아닌 말라깽이 노파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너희의 근황이 궁금해. 지구 땅 어디선가 잘 살고 있는 거지?


지금은 서슴지 않고 '뚱뚱했던 친구들아!' 하고 부르지만, 그 옛날엔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 나뿐 아니라 이른바 '얼평'을 하는 것 자체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여학생에게 뚱뚱하다는 말은 특히 더 금기어이기도 했고.

공공연하게 합의한 적이 없다고 해도 '몸매나 외모는 사람의 됨됨이와는 관계가 없다'는 정도는 누구나 다 기본적으로 알았으니까. 날씬하든 뚱뚱하든 허리띠를 바짝 졸라맸던 걸 봐서는 우리가 몸매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 단지, 남의 몸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래도 꽤 성숙하고 괜찮은 청소년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가깝게 지냈던 절친 중에는 뚱뚱했던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걸 문득 알게 됐어. 왜지? 젊은 시절에는 내가 워낙 말라깽이였기 때문에 뚱뚱했던 사람이 곁에 있는 게 부담스러웠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뚱뚱했던 친구들에게 거리를 두었을까? 왜 베프 중에 뚱뚱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거지? 그저 우연히?


그래, 일단 우연이었다고 치자.

학창 시절에는 워낙 별것 아닌 이유로 친구가 되곤 하니까. 그저 같은 반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는 동네가 가깝다는 이유로, 혹은 한 달마다 바뀌는 앞뒷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는다는 이유로 어울려 다니곤 했잖아. 말하자면, 뚱뚱했던 친구가 우리 반에는 없었고, 우리 동네에 안 살았고, 내 앞뒷자리에는 뚱뚱한 친구가 한 번도 앉지 않아 도시락을 함께 먹은 적은 없어서....나에게 뚱뚱한 친구가 없는 거라???

리얼리? 그게 말이 돼?


지금은 방영되지 않은 개그 프로그램에 '네 가지'라는 코너가 있었어. 거기에는 네 명의 남자가 나와서 자신이 가진 약점을 말해. 키 작은 남자, 인기 없는 남자, 못 생긴 남자, 뚱뚱한 남자였던가.


개그가 시작되면, 그들은 한 명씩 자기를 비호감이라고 여기게 하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면서 그 약점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발해. 지금은 없어진 코너지만 외모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을 유쾌하게 부숴주곤 했어.


뚱뚱하면 미련하고, 예민하지 않다고.
뚱뚱하면 행동이 느리고, 눈치가 없다고.
뚱뚱하면 식탐이 있고, 게으르다고.
뚱뚱하면 어딘가 좀 맹하고 부족하다고.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 그런 편견이 한치도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도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편견이 아파트 출입구의 차단기처럼 뚱뚱한 친구와는 가까이 사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던 것은 아닐까?


편견이 무서운 건,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지는 길을
무심히 끊어 놓기 때문인 것 같아.
실체가 없으면서도 생각을 지배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니까 말이지.

나이가 들면서 눈은 처지고 몸은 굼떠지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도 있어. 세월과 함께 바뀌는 것이 있고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사람의 껍데기는 삭아가지만, 속내는 껍데기처럼 반드시 낡아가지는 않는다는 것.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바대로, 뚱뚱하다든가, 날씬하다든가 하는 것은 사람의 인성과 무관하며, 상대를 알아가는 데 그리 중요한 변수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빨리 떼어버려야 할 것은 어지간한 다이어트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지방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모르게 기생하는 편견이라는 악성 종양이라는 것, 그런 것들...


앗! 하지만 나는 지방이들도 좀 떼어버리기는 해야겠다. 이거 원,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얼마나 숨이 찬지. 다이어트 성공 비법 아는 친구 있으면 내게도 공유해 주길 청하며 이만 줄일게. 안녕!

항아리에 된장이나 매실청을 주로 담그지만. 밑빠진 독은 화사한 수국꽃을 피워주는 화분이 되어주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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