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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수야, 코 흘리는 네가 싫었어

첫 번째 편지 / 허물은 허물일 뿐

by 글방구리

"이 모가지에 때 봐라. 이걸로 국 끓여먹어도 되겠다."

한 달에 한두 번쯤 될까? 대중목욕탕에 가면 엄마는 이태리타올로 몸을 박박 문질러 주면서 이렇게 말했어. 실제로 때는 밀어도밀어도 국수가락처럼 밀려나왔지.

엄마는 무릎에 나를 뉘고 귓속에 귀지를 파 줄 때도 그랬어. "와, 바위가 들어앉았네. 국 끓여먹어도 되겠어." 우리집엔 국거리가 없었던 걸까?

또 다른 어떤 날에 엄마는 달력 한 장을 찢어 펼쳐놓고 머리를 박박 빗겨주기도 했어. 뭔가 투두둑 소리가 나면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엄마의 목소리는 호들갑스러웠어.

"야야, 요거 봐라. 기어가는 거. 아이구, 서캐가 한 가득이네."


머리에는 머릿니가 바글거리고, 목 뒤에는 때가 새까맣게 끼었고, 씻지 않은 발뒤꿈치는 오징어 껍질처럼 각질이 일어나 있었어. 어디 나만 그랬을까. 오십년 전 아이들은 도긴개긴, 거의 다 그랬을 텐데. 그런데 나는 왜 유독 너를, 코 아래 두 줄기 누런 콧물이 들락거렸던 그 모습을 그리 싫어했을까? 다른 아이들이라고 콧물 쓱 문지른 소맷자락이 반들거리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코딱지를 파서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었는데 말이지.


승수야, 하고 부르며 시작은 했으나, 나는 네 이름과 코 흘리던 얼굴만 어렴풋할 뿐, 너에 대한 다른 기억은 없어. 네가 어떻게 자라고 늙었는지 모르니, 아마 네가 날마다 강아지를 데리고 우리 집 앞을 산책하는 옆집 아저씨라고 해도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

그런데도 콧물 흘렸던 아이 승수라는 이름의 낚싯대를 던지면 바늘 끝에는 '싫음'이라는 감정이 낚여 올라와. 나에게 짓궂게 굴었거나 피해를 준 적도 없는데, 그저 너의 외모, 그 중에서도 아주 일부분인 콧물만으로 넌 내게 평생 빌런이 되어 버린 거지.


우리가 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선생님들이 '용의검사'라는 걸 했어.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위해 밤낮없이 일해야 했던 70년대 초반이니,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손발톱까지 일일이 챙겨주기 어려웠겠지. 주로 주말을 지내고 난 다음 월요일이면 책상 위에 손을 내밀고 검사를 받았어. 어떤 친절한 선생님은 손수 손톱을 깎아주셨던 것 같기도 해.


내가 3학년 때였나. 어느 월요일, 그날 선생님은 갑자기 양말도 한짝 벗으라고 하셨어. 오늘은 발톱 검사도 하시겠다면서. 엄마와 목욕탕에 다녀오지 못한 주말을 보내고 났던 거였을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목욕을 하지 않았으면 내 발뒤꿈치는 새까맸을 거니까. 나는 더러운 발을 보이기 싫어서 책상에 엎드려 울었어. 선생님은 그런 내게 양말을 벗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으셨고, 아무 말없이 내 옆을 그냥 지나가셨어.


나는 내 때를, 내 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야.
거의 모든 아이들이 고만고만하게 더럽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비슷한 허물이 있다는 걸 그땐 몰랐어.

승수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가 되어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보니, 내가 싫어했던 네 콧물은 내가 드러내기 싫어하는 허물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구나. 나는 내 때와 허물에만 민감한 게 아니라, 남의 허물도 참아주지 못하는 깍쟁이였다는 것도.


오늘 너에게 편지를 쓰면서 '허물'과 '허물'이 같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로서 허물과 애벌레가 벗어던지는 허물이 같은 단어로 쓰이고 있다는 신기한 사실 말이야. 어른이 되기 위해 아이의 삶은 당연히 거쳐 가는 과정인 것처럼,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애벌레가 허물을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저지르는 수많은 허물들도 숨길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몰라. 아니 오히려 숨기고, 가리고, 못 본 체할수록 때와 허물은 덕지덕지 쌓여서, 급기야 '때'와 '나'를 한몸이라고 착각하게 되겠지.


승수야,

누군가 우체통마다 노란 은행잎을 하나씩 꽂아두고 갔더라. 집집마다 은행나무 한 그루씩 배달된 가을이야. 그럴리가 없겠지만, 만약 아직도 네가 콧물을 흘리고 다닌다고 해도 질시에 가득 찬 눈으로 널 보지 않으려 해. 그 대신 그냥 시원하게 풀어버리라고 휴지 한 장 건네주고 싶구나. 나 역시 그 날이 다시 온다면, "어제 못 씻었어요." 하고 양말 한짝 시원하게 벗어 보여드릴 수 있겠지.


이만 안녕.

나뭇잎들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허물이라고 부끄러워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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