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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촌스럽잖아, 창봉!

두 번째 편지 / 상처를 준 이유가 너무 사소해서

by 글방구리
야간 자습을 하고 깜깜한 골목길을 걸어 들어오는데,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 내가 빠르게 걸으면 뒤에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도 빨라지고, 내가 천천히 걸으면 뒷사람도 천천히 걷고. 그러다가 그 자리에 서 버리면 뒤에 오던 사람이 와서 시집을 하나 건네지.
"이거 한 번 읽어 보실래요?"
거절할 사이도 없이 던지듯 주고 가는 시집. 그 사이에는 단풍잎이나 말린 네잎클로버가 눌린 채 끼워져 있고, 쪽지가 하나 들어 있지. 다음 주 일요일, 오후 두 시 종로서적 이층에서 기다리겠다고. 꼭 나와 달라고.


이거 실화냐고? 내 나이 때, 여고시절을 지낸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꾸었을 꿈이야. 요즘에야 초등학생들부터 남녀 아이들이 서로 사귄다느니, 썸을 탄다느니 하면서 이성 교제를 하지만, '라떼' 그랬다가는 학생부에 불려 갔겠지. 또래 이성 친구의 얼굴을 그나마 공식적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곳은 교회가 전부였을 걸? 그러니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이성을 만날 기회가 없는 소녀들은 알지 못하는 소년이 밤길에 수줍게 따라와 데이트를 청하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한 거지.


나는 교회는 아니지만 레지오마리애라는 종교 서클 활동을 했어. 보통은 학교 안에서 우리끼리 회합을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가톨릭 학생회관에 모이기도 했지. 학생회관은 회합실을 학교 안에서 구하지 못한 다른 학교 학생들을 마주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어.


그날 회관에 왜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아무튼 끝나고 나니 밤이 늦었더랬어. 회관에서 나와 집에 오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 갔는데, 서너 명의 남학생들이 그곳에서 수군거리고 있더라. 그리고 내가 가니까 그중 한 명이 우물쭈물하면서 다가와 책 하나를 내밀었어.

"거기 '소녀에게'라고 쓴 시 있어요."라고 하면서.


나는 그때만 해도 이성 앞에서 숫기가 없었어. 밤이 늦은데다 남학생 여럿이 모여 있으니 조금 무섭기도 해서 고개를 똑바로 들지도 못했어. 그저 네 교복에 붙어 있던 이름표만 힐끗 봤는데, 네 이름이 창봉. 자다가 두드리는 봉창도 아니고 창봉.

잠깐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에 버스가 왔고 나는 몸을 홱 돌려 뛰어가 버스를 탔어. 내게 내민 책은 당연히 받지 않았지.

'이름이 하필 창봉이래.'

만화책이나 드라마 주인공 이름 같은 건 아니어도 창봉이 뭐야. 골목길에서 이루어질 뻔한 로맨틱한 순간은 그렇게 엔딩.


창봉이 너는 내게 뻥 차였다고 생각한 이후, 더는 레지오마리애 회합에 나오지 않는다고 했어. 네가 계속 나왔더라면 내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모르겠다만, 오직 이름 하나만으로 거절을 당했으니 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아니, 넌 내가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이유조차 알지 못했겠지.


만약 네가 그때 그 일을 계기로 가톨릭교회를 등지게 된 건 아닐까, 문득 겁이 나기도 해.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어도 책은 받아줄 수 있었을 텐데, 시는 읽어줄 수 있었을 텐데. 친구들 앞에서 무안하지 않게 잘 거절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가끔은 이유도 모르는 채 상처를 받으며 살아.
상처를 주는 사람은 너무 사소해서 상처를 준 줄 모르고,
상처를 받은 사람은 너무 사소한 걸로 상처를 받아 꺼내놓기 부끄러워하지.
하지만 사소한 것이 없다면 중요한 것도 없어.
우리 인생이 그래.


네가 스스로 지은 이름도 아닌데, 그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네 마음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너희 부모님이 네게 담아주신 그 이름의 뜻조차 알지 못하면서, 촌스럽다고 폄하해 버렸던 것. 진심 미안하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너를 비롯한 모든 '창봉 님'들에게 용서를 빌며 글을 마칠게.


이만 안녕.


추신 1. '소녀에게'라는 시에는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니?

추신 2. 요즘은 '창봉'이라는 이름도 괜찮아 보여. 나름 레트로하고.


요즘은 내 몸처럼 함께 낡아가는 것들에 더 눈길과 애정이 가네. 촌스러운 소식통도 촌스러워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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