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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자랑질일 편지를 쓴다

열 번째 편지 / 선 넘지 말라는 말은 쓰지 않으려고

by 글방구리

나는 지금 멀리 만년설이 덮인 마운트쿡을 바라보며 이 편지를 쓰고 있어.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 여행을 시작한 지 오늘로 벌써 여드레가 되었네. 어젯밤 도착해 공유 주방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가장 잘 되는 조리기구를 안내해 준 키 큰 젊은이가 오늘은 웃으며 굿모닝 인사를 건넸어. 가 본 적은 없지만 책으로 수없이 만난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 분위기가 이렇겠구나 막연히 짐작해 보는 아침이야.


어제는 대여섯 마리 알파카와 하이랜드 소 두 마리를 키우는 농장에서 팜스테이를 했어. 소박하지만 친절한 주인 덕분에 마음 편하게 묵고 나오면서 작은 동네 구경을 했어. 초고속 인터넷, 5G 덕분에 거의 실시간으로 편지가 배달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 동네 집배원은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더구나. 여행 기간 중에는 온라인 세상은 멀리하고, 되도록 내 눈으로 보고 내 발로 걷자고 했는데 마음이 달라졌어. 오래전에 이탈리아 남편을 만나 재혼한 미현이, 네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중학교 때 우리 사총사. 졸업식 사진은 넷이 함께 찍지 않은 걸 찾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넷은 친했지.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엄마와 살고 있던 너 미현이, 피겨스케이팅을 했던 부잣집 딸 소순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던 숙이, 그리고 나.


너는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깨는 삶을 살곤 했어. 성악을 전공한 것까지야 네 적성을 잘 찾아서 갔다고 생각했지만,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을 한 것도 그랬고, 결혼해서 낳은 아기를 혼자 사는 친정 엄마한테 맡기고 둘만의 가정을 따로 꾸린 것도 센세이셔널했어. 사실 우리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해도 이혼이라는 것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놀라게 한 건 너희 엄마부터인지도 모르겠네.


너희 집에 놀러 갔을 때 천진난만하던 숙이가 "아빠는 안 계셔?"라고 물었고, 너는 그날 '진실게임'을 하면서 너희 가정사를 털어놓았지. 우리는 부모님의 속사정까지 알 수 없거니와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니, 너희 부모님의 이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쑥덕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금 놀라기는 했겠지.


그러나 네가 엄마에게 맡긴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었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남편과 헤어지고 이탈리아로 날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어. 그 후 몇 년 되지 않아 조각미남 같은 이탈리아 남편을 대동하고 귀국했을 때는 뒤로 까무러치게 놀랐고. 외국인 남자와 재혼이라니, 파란만장하기도 하여라. 이런 생각이 들더라.


세월이 흐르며 많은 것이 달라졌지. 편지지에 우표를 침 발라 붙여 부치던 편지가 일초만에 날아가는 전자메일로 바뀐 것처럼, 이혼이나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졌어. '다문화'라는 말이 동남아 아가씨를 들인 노총각 가정을 일컫는 단어로 오용되고 있지만, 국적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한 가정이라면 모두 다문화 가정인 거지.


그런 뜻에서 나도 '외국인(外國人)'이라는 말보다는 '이국인(異國人)'이라는 말을 선호해. 내외, 안과 밖이라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선을 그은 것이고, 내가 속한 선 밖에 있는 집단을 분명하게 가르는 배타적인 느낌을 주거든. 선을 긋는 건, 초등학교 때 책상에 그으며 넘어오지 말라고 짝꿍에게 경고하던 걸로 끝내야지?

안팎은 본질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지만,
다르다는 건 그저 서로를
구별하는 단어로 보여서
나는 외국인보다는 이국인이라는 말이 더 좋아.


보고 싶은 미현아, 오늘 나는 트래킹을 하려 해. 우리나라 산과는 른 풍경을 보고, 다른 흙을 딛게 되겠지. 평소에 보지 못한 다른 광경에 감탄하면서도, 눈에 익숙한 꽃들을 보거나 나무를 만난다면 반가워할 거야.

익숙한 것은 익숙해서 편안하고,
다른 것은 달라서 신기한 게
어디 산길뿐이겠니.

내가 산 인생은 내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 사람들이어서 편안하고, 네가 살아온 인생은 눈에 익지 않은 만년설처럼 다르고 달라서 신기한 거겠지. 그러니 우리가 지금 다시 만난다고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아.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는 기적이 일어난다면 내게 꼭 답장해 주렴.


추신: 주방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한 장 첨부할게. 엽서를 보내는 기분을 되살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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