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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Aug 12. 2024

숨다

숨는 데는 숨 쉬는 데

나도 알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지.

우리에게 밥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당신들이 전자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우리 종족을 원수처럼 보는 옆집 남자는 후자에 속하겠지.


우리가 당신들에게 특별히 뭘 잘해 줘서 당신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옆집 남자에게 불쾌감을 줘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지.

그냥 당신들은 당신들 마음대로 우리를 사랑하는 거고,

옆집 남자는 옆집 남자 마음대로 우리를 혐오해.

우리가 고양이가 아니라 다른 어떤 동물이었다고 해도

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봐.

보상을 바라지 않는 참사랑은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생기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자신자기 내면에서 만들어 내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당신들은 우리가 옆집 남자의 눈에 띌까 봐 염려해.

혹여 우리 밥그릇 속에 담아 놓은 면도칼에 입을 벨까,

급히 지나가다가 그가 쳐 놓은 덫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그러나 너무 걱정마시게.

옆집 남자에게서 뿜어 나오는 혐오의 기운을 느끼는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남을 최상의 방책을 알고 있으니.


두려울 때,

우리는 숨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거나 꼬리를 부풀리는 것으로

상대의 혐오가 제압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우리는

옆집 남자 같은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가 없기에,

숨을 데를 찾기로 해.


이것은 당신들 집에 깃들여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야.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굉음이 들리거나

낯선 방문객의 냄새와 목소리가 감지되면

의자 밑으로, 세탁기 뒤로 몸을 숨기지.

그리고 숨을 꼭 참지.

내 숨이 새나가지 않도록, 내 숨을 들키지 않도록.


숨을 쉬기 힘들 때,

우리는 숨어.


우리 유전자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맹수의 본능은 감추고

안전하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참아.

우리를 사랑하는 당신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역설이지만 숨어 있으면 당신들의 사랑어린 목소리가 더 잘 들리지.

그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비로소 참았던 숨도 다시 쉬게 되고,

평범했던 일상으로 감사하면서 되돌아오지.


나는 당신들도 숨을 데가 있으면 좋겠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만큼 두렵고 무섭기도 하겠지만

당신들을 부르는 목소리를 곧 알아들을 수 있을 거야.

당신이 숨는 데가 숨 쉴 데이기도 하다는 걸

당신들도 알게 되면 좋겠어.


"엄마 걱정 마세요. 여기는 제 몸 색깔과 비슷해서 저를 찾기 어려울 거예요."
이건 숨은 게 아니고 창밖을 내다보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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