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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방구리 Nov 13. 2024

만나다

우리 만남이 행운이었기를

누군들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냥이가 있을까마는,

하필 먹고살 걱정까지 탯줄 끝에 달고나온 길냥이로 태어났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나는 비록 태어난 지 석 달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그래도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운빨 좋은 길냥이가 아닐 수 없어.


나를 임시 보호해 주다가 적당한 집사를 골라 보내주는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부부.

그들에게 나는 다섯 번째 '분양(이 말을 쓰기 싫지만 딱히 대체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이라고 했어.

어제 그들은 평생 날 돌봐줄 집사를 만나기 전에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지.


거기에서 아픈 두 냥이를 데리고 온 늙수그레한 집사 부부를 만났어.

치료와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네 사람은 원래 잘 알던 사람들인 것처럼 마구 수다를 떨더군.

잠결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기시감이 드는 거야.

'나 이런 장면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어디였지?'


그래, 그 장면은 꼭 산후조리원 수유실에서 마주 앉은 산모들 대화 같았어.

공통점이라고는 아기를 낳았다는 것 하나밖에 없으면서도

아주 오랜 친구인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에 격하게 공감하는 그곳 말이야.

"어머나, 아기가 너무 예쁘네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예방접종 하셨어요?"

"아기가 태어나면서 황달이 있어서요, 잘 안 먹네요."

어머나, 그래요? 세상에, 저런, 와우!

뭐, 이런 온갖 감탄사가 동원되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더군.

"얘는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아니에요, 예방접종이에요."

"그렇구나! 다행이다~ 어머, 몇 개월이에요?"

"아직 아기예요."

", 얘는 성묘인데도 엄청 의젓하네요. 집에 있는 저희 애는 너무 활발해서 그렇게 데리고 다니는 건 꿈도 못 꿔요."

"자는 거 너무 귀엽죠?"

하하 호호, 깔깔깔깔.


난 잠결에 그들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지.

앞으로 동물병원에 온다고 해도 너무 겁 먹을 필요는 없겠다고.

동물병원은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만나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다고.

아픈 동물들을 고쳐 보겠다고 데리고 오는 보호자도,

아픈 동물들을 성심껏 고쳐주는 의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참 따뜻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방금 만난 사람이라도 금세 마음을 열게 되는 거라고.

이런 사람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더없는 행운이라고.


마음의 온도가 만남의 깊이를 결정해.


오래, 길게 아는 사이라고 해도 차가운 마음으로 대하면 그 만남은 스쳐 지나갈 뿐,

향기도 온기도 남기지 않지.

비록 내가 만남을 선택할 수 없는 길냥이 신세라고 해도,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따뜻하고 복슬복슬 부드러운 우리 털을 만지게 허락하고 싶지 않아.

살면서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좋겠어.


내가 너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고

너도 나를 만난 걸 행운으로 여기는 관계,

나와 집사 사이가 그런 관계면 더 바랄 게 없겠어.

집사가 다른 사람들과도 그런 관계였으면 좋겠고.


메이, 막내, 가을이. 너희가 우리를 만난 것도 너희에게 행운이었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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