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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가능한 일들

이미경 / 오늘만 특가 바나나

by 글방구리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저는 [보리출판사] 팬이었어요. '개똥이네 놀이터'라는 월간지는 창간 독자였고, 집에 있던 책장은 보리의 책들로 빼곡히 채웠습니다. 말이 늦던 큰 아이는 '아기 그림책'을 보며 말이 터졌고 '달팽이 과학동화'로 사교육을 대신했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보리 국어사전]과 세밀화 도감류를 끼고 살았죠.


물론 집에 보리 책만 있던 건 아니에요. 여러 출판사의 꽤 많은 그림책을 낱권으로 사주었지만,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보리의 몇몇 책을 특별히 더 좋아했어요. 제본이 떨어지도록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오빠에 이어 동생까지 물려받아 읽고 또 읽었던 책들은 아이들이 다 큰 뒤에도 버리기가 아깝더군요. 그중에 세밀화로 사계절을 담은 '도토리 계절 그림책'이 기억납니다. 책 제목이 이래요.

[우리 순이 어디 가니](봄), [심심해서 그랬어](여름), [바빠요 바빠](가을), [우리끼리 가자](겨울)

눈길을 확 사로잡는 강렬한 색채라고는 볼 수 없는, 수채화 같은 이 그림책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차분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평화로운 어느 시골 마을로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었죠.

돌돌돌돌 냇물 따라 광대나물 솜방망이 꽃길 따라
막걸리 쏟아질라, 조심조심 가는데
뽕나무에서 들쥐가 물어. 우리 순이 어디 가니?
([우리 순이 어디 가니] 중에서)

이미경 작가님이 쓰신 두 번째 이야기 '오늘만 특가 바나나' 도입 부분을 읽으니 보리 그림책을 읽는 듯했어요. 산문이지만 운문 같고, 운문 같지만 산문인 글. 누군가 곡을 만든다면 노랫말로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글. 오래전 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읽을 때처럼 소리 내어서도 읽어 보았지요.


"사락사락 수수 빗자루 고운 비질로

까끌까끌 보리까락 살뜰히 떼어내고

뽀득뽀득 물걸레질 엉겨 붙은 곡식 분을 말끔히 닦아낸 후

영차영차 커다란 밥상 힘을 합쳐 멍석 위에 그득하게 펼쳤다."(35쪽)


노랫가락처럼 읽어서였을까요? 사춘기 아들과 뾰족하게 대립하는 부분을 읽는데도 왠지 리듬을 타고 있는 듯 경쾌하네요.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을 조심스레 여는 아들과 "엄마가 머무는 공간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고 싶"(40쪽)은 엄마의 조화로운 이중창에 "마당에(는) 티격태격 사랑 꽃이"(42쪽) 피네요.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오늘 가면 내일은 살 수 없어요.

삶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늘, 이마저도 오늘만 특가 이러나?(42쪽)


오늘 하루 특가로 살 수 있는 게 바나나만은 아닐 거예요. 내일이면 분명히 구할 수 없는 '오늘'이라는 시간. 그리고 어쩌면 내일 못 만날 수도 있는 내 곁의 사람들. 저도 작가님 따라 곰곰이 생각해 보렵니다, 오늘 가면 내일은 살 수 없는 나만의 바나나는 무엇인지.


https://brunch.co.kr/@253d3e5900ae457


덧. [글루미 릴레이]에는 이미경 작가님의 그림이 174~175쪽에 실려 있네요. 작가님의 브런치에는 더 많은 그림과 글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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