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집에서 혜진이, 영지 언니와 봉숭아 물을 들이기로 했다.
작은 소쿠리를 들고 조심히 수돗가와 장독대 옆 핀 봉숭아 꽃을 따기 시작했다.
봉숭아 씨는 동그란 주머니 모양으로 꽃처럼 군데군데 매달려 있는데 꽃을 따다 그 주머니를 건드리면
금방 톡 하고 터져버린다.
약한 힘에도 톡 하고 터질 때면 허무하면서도 쾌감이 느껴졌다.
가끔은 씨앗 주머니를 바둑알 튕기듯 튕기며 톡톡 터지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 봉숭아 다 땄어"
"봉숭아 이파리도 좀 따와야제."
엄마가 우리의 소쿠리를 보더니 그러면 그렇지 라는 듯한 말투였다.
이파리와 꽃잎이 한 소쿠리를 수북이 채우자 엄마는 백반을 챙겨 나왔다.
그러고는 납작한 돌을 찾아 깨끗이 씻고는 그 위에 따온 꽃잎과 이파리를 골고루 올리고 백반가루도 살짝 섞어
또 다른 돌로 찍어댔다.
"이파리랑 백반을 넣어야 색도 진하고 반들반들하게 물들이제"
엄마의 돌질에 봉숭아는 원래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금방 짓이겨져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검푸른 물을 흠뻑 머금은 짓이겨진 봉숭아를 동글동글 뭉쳐내 내 손톱에 올리고는 비닐로 감싼 후 끈으로 묶었다.
혜진이와 영지 언니가 별말 없이 본인 손톱에 봉숭아가 올려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메리는 옆에서 배를 깔고 누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멀끔 멀끔 쳐다보았다.
"엄마 메리 발톱에도 봉숭아 물들여주자"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안 되니까"
손이 바쁜 엄마는 나의 농담을 받아줄 여유는 없는 듯하다.
"이거 물들이려면 한참 이러고 있어야 해. 비닐 빠지면 안 되니까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어!!"
끈으로 묶인 나의 열 손가락은 투명한 비닐 속의 검푸른 색으로 인해 약간은 징그럽고 더럽게 느껴졌다.
"엄마는 안 해? 내가 해줄게"
"에이 됐다 됐어. 엄마는 옛날에 많이 해봐서 안 할란다."
엄마는 손사래를 치고는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공기는 못하니까 고무줄 할까?"
"고모가 얌전히 있으랬는데?"
"손가락만 안 움직이면 되지!!"
"엄마 우리 고무줄 하게 감나무에 고무줄 묶어줘"
"바빠 죽겄구만 별걸 다 시키네"
엄마는 귀찮아하면서도 집 입구의 감나무 허리와 변소 손잡이에 고무줄을 묶어 주었고 엄마 덕에 우리는
니편 내 편이 아닌 같은 편이 되어 싸우지도 않고
신나게 잘도 고무줄을 넘나 들었다.
메리도 재미난 우리 놀이에 끼고 싶은지 자꾸 우리 옆을 맴돌았다.
"메리야 너도 할래?? 깍두기 해라"
나의 농담에 아무런 대꾸도 없이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한참을 뛰고 나서야 우리는 지쳐 툇마루에 대자로 누웠다.
"애들아 일어나라."
엄마의 말에 일어나 보니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다.
우리는 제일 먼저 손가락의 비닐을 풀어헤치고는 수돗가로 달려가 손을 씻었다.
손톱에 선명하게 붉은색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디 보자. 응~ 이정도면 잘 들여져서 오래 가겄다."
엄마의 말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펼쳐 서로의 손톱을 칭찬했다.
티비에 나오는 매니큐어 바른 예쁜 손 같아 자꾸만 손가락을 펼쳐 보았다.
손톱뿐만 아니라 손가락까지 붉게 물들었지만 손가락의 물은 금방 빠질 것이다.
그리고 손톱의 붉은색은 가을이 지날 때까지 내 손가락을 예쁘게 빛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