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와 같이 문장의 첫머리에 지명 즉, '광주'를 강조하는 손님들은 대부분 외지인이다. 특히 중년 이상일수록 자신이 다른 곳에서 왔음을 강조하는데 위의 말을 한 손님 또한 50은 훌쩍 넘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겉모습으로 보아 전국을 돌며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는 듯했다. 이토록 티를 내는데 나도 화답을 해야지.
"광주분이 아니신가 봐요."
"네. 인천에서 왔어요."
(네. 저도 광주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인천은 내가 10년을 살았던 곳이고요.)
"인천 어디서 오셨어요?"
"부평이요."
(부평이라. 중고등 시절 부평 지하상가를 많이 다녀서 빠삭하죠.)
"그러세요?"
더 이상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둔한 아저씨들은 내가 인천 어디냐고까지 물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나를 광주 토박이로 여기는 듯했다. (하긴 내가 요즘 사투리를 꽤잘하지)
"어제 광주 처음 내려왔는데 어젯밤 갔던 마트 사장이 예쁘더니 여기 사장님도 예쁘네요."
아저씨들 특유의 정직하고 솔직한 화법에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다.
(인천에서 예뻤던 내가 광주에서도 이쁜 거로 칠게요 아저씨들. 몇 년 전 일이니까 그땐 지금보다 젊고 예뻤다고 치자.)
더 이상의 깊은 대화는 사양하는 관계로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와 함께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인천으로 올라가 광주 마트 아줌마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오래되고 조용한 동네의 마트라서일까? 초면임에도 말을 거는 손님들이 많고 그 유형도 다양하다. 경상도에서 온 아저씨들은 굳이 티를 내지 않는다. 최소한의 대화 아니 인사만으로도 외지인임이 설명되어서인지 꼭 필요한 말만 한다. 예를 들면
"더원블루한 갑 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예의 바른 인사를 잊지 않는다. 타지 특히나 케케묵은 지역감정이 더해진 낯선 곳이라 조심스럽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순도 100% 나의 뇌피셜이다) 서운함이 없도록 나 또한 평소보다 더 밝고 상냥한 슈퍼 아줌마 모드로 대한다. 몇 달을 겪어봐도 일관적으로 말이 없다. 원래 성격인 듯하다. 역시 취향 존중하여 조용한 친절을 앞세운다.
전남 다른 지역에서 오신 분들은 자녀들 집에 방문한 경우다. 대학에 입학했거나 취직해서 원룸에 이사하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자녀들의 생필품이나 먹거리를 대신 장 봐준다.
"아따 뭐슬 이렇게도 많이 산다냐? 광주는 마트가~"
우리 마트를 광주 마트로 일반화하거나, 광주 비교급을 사용하며 대화를 트는 이 손님들은 사투리부터 남다르다. 적응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광주 사투리는 심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자녀 집을 방문한 분들의 사투리는 차원이 다르다. 경연 대회에 나올 법한, 전라도 오리지날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듣기 평가하듯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말투에서 자녀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느껴진다. 밝고 긍정적인 단어들이 경쾌한 목소리에 힘을 더해 아이를 응원하고 있다. 필요한 것 더 사라며 등을 토닥이는 다정한 손길과 함께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 험한 세상을 겪을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드러난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뭉클하다. 미래의 내 모습인 것 같아 감정이입이 깊이 된다.
'내가 바로 외지인이다.' 티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은 서울, 경기도 등 수도권 사람들이다. 앞에서 말했듯 젊은 친구들은 일관적으로 과묵하다. 50대 이상의 장년층, 특히 아저씨들은 과묵 과는 거리가 먼데 나이가 들면 오지랖이 넓어지고 넉살이 좋아지는 것 또한 하나의 이유가 아닐지 싶다.
"포인트 만들어 드릴까요?"
낯선 손님이 두세 번 오면 꼭 물어보는 멘트다.
"아니요." 젊은 친구들의 대답은 짧고 간결하다.
"아니요. 제가 서울이 집인데 광주에 일하러 온 거라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단 두세 번 오가는 대화로 아저씨들은 무슨 일을 하며 여기에 얼마 동안 머무를지 서울 집은 어디인지까지 개인정보를 누락 없이 얘기한다. 내가 또 서울은 좀 알지. 종로로 외국어 학원에 다니고 강남에서 알바하던 시절이 있었지. 친구들과 만남의 장소는 항상 종각역이었지. 인사동 찻집에서 가래떡을 꿀에 찍어 먹으며 차를 마시고 청계천을 산책하던 시절이 있었지. 개인정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나의 과거(?)를 발설하며 아는 척하지는 않는다(이 글에서는 과거를 소상히 알리고 있지만). 손님과의 대화에 호응만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곳에서설렘이 최고조인 시점에 그 흥을 깨고 싶지 않아서이다.
사람 마음을 어찌 이리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같은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광주 내려와 처음 백화점에 갔을 때 점원의 사투리에 웃음이 나왔다. 사투리에 대한 비하는 아니다. 나의 고향은 전남으로 어렸을 적 이사하여 30년을 인천과 경기도에서 살았다. 세월에 따라 엄마 아빠, 나의 사투리는 잊히고 표준어에 맞춰졌다. 나는 당연히 표준어를 썼고 부모님의 경우 여기 현지 사투리와는 한참 동떨어진 표준어와 사투리 그 어디쯤의 말을 구사했다. 광주에 내려오자마자 유치원 등록을 위해 상담하는 유치원 원장님, 동네 마트 아주머니, 부동산 중개인 등 대부분이 사투리를 쓰는 환경이 낯설었다. 마치 책이나 드라마로 외국어를 배우다 그 나라에 직접 가서 듣는 외국어에 대한 첫인상 같달까? 점원의 사투리에 웃음이 나왔던 건 내가 진짜 광주에 와있다는 실감에 묘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남편은 한 술 더 떠 우리 가게에 오는 아저씨들처럼 외지인 티를 내고 싶어 했는데외식할 때 더욱 그랬다
"광주는 이런 반찬이 나오는구나!"
종업원이 반찬 서빙을 하면 꼭 이 한마디를 덧붙였는데 무슨 심리였을까? 눈길을 끌고 싶었던 것일까? 중국에 살 때 어려운 일이 있거나 실수하면 "난 한국인이잖아"를 외치며 퉁치곤 했다. 더 따지려다가도 에이 됐다는 식으로 마무리되곤 했는데 비슷한 마음으로 이해를 바랐던 것일까? 마치 프리패스, 절대권력의 암행어사 마패처럼? 그것도 아니면 단지 들뜬 마음의 표현이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아닌 1년이 될 때쯤 외지인, 타지라는 단어가 무색해졌다. 생존 앞에서 이방인처럼 굴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재빠르게 적응해야 했고 헤쳐 나가야 했다. 나는 아직도 광주를 모른다. 가게-집을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일상으로 광주의 어느 동네를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구 동구 서구 북구 광산구만 구별하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외지인일까? 아니면 이제는 현지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가는 동선이 거기서 거기로 한정적일지라도 7년째 사는 중이다. 마음 터놓고 얘기할 친구도 생겼고, 맛집 리스트도 있으며 동네 돌아가는 소식을 알고 있다.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더 깊이 고민하는 거로 보아 현지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온 선배님들이 우리 동네에 여럿 있다. 슈퍼이야기 1, 2편에 나온 손님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 동네에서 수십 년째 통닭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의 고향은 서울 마포다. 예전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되었다.
"여기 고기가 맛있더라고요. 양도 많아서 가끔 와요."
"여기 괜찮아요. 내가 고기는 좀 알지. 내가 마포에서 살았거든. 근데 남편 따라 광주에 자리 잡은 지가 벌써 40년이야. 애들 낳고 키우느라 세월이 다 가더니 이젠 마포도 까마득해요."
주름이 깊이 패도록 환하게 웃는 얼굴에 반짝이는 눈망울이 꼭 고기와 곁들인 소주 탓만은아닐 테다. 부산 사투리를 아주 찰지게 쓰는 손님 또한 자리 잡은 지 40년으로 미용실 원장님(미용실 사장님의 밥상 편의 주인공)과 단짝 친구다.
"난 여기 사투리가 진짜로 안 써져. 염병하게도 안 고쳐져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손님은 잘 모른다. 부산 사투리와 억양에 염병하네가 틈틈이 들어간다는 걸.
나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10년 단위로 이사했다.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중국에서 20대를 보냈다. 결혼하고는 용인 수지에서 아이 둘을 낳고 7년을 키웠다. 우리 아이들은 광주에서 유치원과 초등을 보내고 있다. 언제 또 역마살이 도져 광주를 떠날지 모를 일이다. 서울로 가게 될지, 남편의 바람대로 낚시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기 위해 어느 바닷가로 떠날지 정해진 건 없다. 계획한다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걸 겪어봐서 무계획이 우리의 계획이다. 다만, 외지인으로 왔든 현지인으로 살아왔든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을 뿐이다. 통닭집 사장님과 부산 손님이 40년을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