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메일을 보내고 가게 계약서를 썼다.

회사 그만두고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진짜 무서운 건 그날부터였다

by 경리언니찐나

퇴사 메일을 보내는 순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하준은 회사원이던 마지막 날, 곧바로 가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다. 설렘은 분명 있었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내 일’이 아니라 ‘내가 책임질 가게’로 바뀌기 시작한다.

1.png

하준은 퇴사 품의서를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제목은 단순했다. 사직서.

마우스를 올려놓고도 한참을 못 눌렀다. 보내기 버튼 하나가 이렇게 무거울 줄은 몰랐다.

회사 생활 11년. 남들은 버틴다고 했고, 하준도 자기가 꽤 잘 버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월요일이 싫어도 출근했고, 본사 지시가 말이 안 돼도 웃으면서 넘겼다. 실적 압박이 들어와도, 점주들 전화가 주말까지 울려도, 그냥 원래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남의 가게 매출 올리는 일은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왜 내 인생은 계속 미뤄두고 있지?

처음엔 농담처럼 말했다.

“나중에 진짜 작은 가게 하나 하고 싶다.”

그 말이 두 번째부터는 상상이 됐고, 다섯 번째쯤부터는 계획이 됐고, 결국 오늘은 사직서를 썼다.

하준은 숨을 한 번 길게 쉬고 마우스를 눌렀다.

보내기.

정적.

분명 같은 사무실인데, 메일 하나 보내기 전과 후의 공기가 달랐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날 오후, 하준은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여기 자리 괜찮아요. 점심 상권 살아 있고, 저녁엔 배달도 꽤 나와요.”

공인중개사가 건넨 말에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귀에 다 들어오진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약서 아래쪽 숫자에 박혀 있었다.

보증금. 월세. 권리금. 관리비.

숫자 하나하나가 종이에 적힌 글자가 아니라 현실처럼 느껴졌다. 회사 다닐 땐 월급 명세서 숫자를 기다렸는데, 이제는 빠져나갈 숫자를 먼저 보게 됐다.

“결정하실 거죠?”

하준은 목이 말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지만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사실 이 자리 오기 전까지는 자신 있었다. 상권도 봤고, 주변 경쟁 매장도 봤고, 메뉴도 몇 달 동안 고민했다. 본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으니 완전 초보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계약서 앞에 앉는 순간 알게 됐다.

창업은 결심으로 시작하지만, 운영은 숫자로 시작된다는 걸.

“네. 할게요.”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도장을 찍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후련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이상하게 웃기기도 했다. 내가 진짜 사장이 된다고? 그것도 월급 주는 사장이 아니라, 월세부터 버텨야 하는 사장?

부동산을 나와 골목 끝에서 하준은 한참을 서 있었다. 자기가 계약한 가게 앞이었다.

아직 간판도 없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벽지는 오래됐고 바닥도 손볼 데가 많았다. 누가 보면 그냥 망한 가게 자리 같았다.

그런데 하준 눈엔 달랐다.

주방이 들어올 위치, 키오스크 놓을 자리, 테이블 배치, 손님 동선, 혼자 일할 때 불편한 포인트까지 머릿속으로 다 그려졌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것도 그려졌다.

오픈 준비. 식자재 발주. 직원 채용. 스케줄 관리. 출근 체크. 급여 정산.


하준은 갑자기 웃었다.

“아니, 잠깐만. 나 아직 장사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머리가 아프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 민석이었다.

“사직서 냈냐?”

“냈지.”

“그래서 기분이 어떠신가요, 미래의 사장님.”

하준은 비어 있는 가게를 보며 말했다.

“아직은 멋있어.”

“아직은?”

“응. 아직은 그냥 멋있어. 근데 왠지 곧 안 멋있어질 것 같아.”

민석이 웃었다.

“당연하지. 사장은 멋있는 직업이 아니라 버티는 직업이니까.”

“야, 시작도 전에 재 뿌리지 마라.”

“농담 아니야. 진짜 시작은 가게 열고 나서야. 장사는 음식만 팔면 되는 줄 알지? 사람 들어오고 나가고, 시간 새고, 돈 새고,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하준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려다 멈췄다.

왠지 그 말이 가볍게 안 들렸다.


사실 하준이 꿈꿨던 건 ‘내 가게’였지, ‘직원 출근시간 확인하고 근무표 맞추고 급여 계산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런데 가게를 열면 결국 그것도 다 자기 일이 된다.

요리도 해야 하고, 응대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사람도 뽑아야 하고, 사람이 늦으면 대신 서 있어야 하고, 월말엔 계산도 해야 한다.

사장이 된다는 건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아무도 대신 안 해주는 일을 전부 맡는 거였다.


그날 밤, 하준은 집 식탁에 계약서를 펼쳐두고 한참을 바라봤다.

엄마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진짜 하는 거야?”

“응.”

“무섭지 않니?”

하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웃었다.

“무섭지. 근데 회사 다니는 것도 안 무서운 건 아니더라.”

엄마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래도 네 가게 하면 좋지. 고생은 해도 네 선택이니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고생은 해도, 내 선택.


하준은 계약서를 접고 휴대폰 메모장을 열었다. 제목을 적었다.

오픈 준비

그리고 그 아래를 빠르게 채워 내려갔다.

인테리어 견적 확인

메뉴 최종 정리

주방 동선 체크

직원 채용 공고

근무 스케줄 방식 정리

출근 확인 방법

급여 계산 기준 메모

식자재 거래처 확인

쓰다 보니 메모는 점점 길어졌고, 하준의 표정은 점점 진지해졌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가게를 연다”는 말이 꿈처럼 느껴졌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문장처럼 보였다.

내가 책임질 가게를 연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하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해보자.”

설렘은 아직 있었다. 두려움도 같이 있었다.

하지만 하준은 아직 몰랐다. 진짜 무서운 건 오픈도, 월세도, 첫 손님도 아니었다.

누가 몇 시에 출근했는지, 왜 바쁜데 돈이 안 남는지, 열심히만 하는 것과 운영을 잘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그걸 알게 되는 건, 조금만 더 지나서였다.



가게를 여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하지만 하준은 아직 몰랐다.

진짜 무서운 건 계약서가 아니라 그다음부터라는 걸.


다음 화 예고

다음 화에서는, 오픈도 안 했는데 돈이 먼저 빠져나가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수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사장님은 처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