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기차 탈주 사건이후 회사 내에 우리 편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직장생활에서 오는 차별을 겪는 사원급이었다. 사원이라지만 연령대가 다양했다.
특히 현장 직원에서 관리직으로 전환된 연륜이 있는 분들은 평소에는 사무실의 잡다한 업무를 했다. 그러다가 사무실과 현장 간에 갈등이 생기면 사무실의 나팔수가 되어 현장 쪽 여론몰이를 한다. 그래서 현장 쪽 지인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낙인찍힌다.
배신자 고병수 씨는 본부장의 따가운 질책을 받는 미주와 영혜를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 역시 매일 사직서를 품고 다니지만 가족 생계를 위해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광산보안기능사 자격증 외에도 10여 개의 자격증을 더 보유한 사무실의 인재였다. 우리들 사이에서 인재일 뿐, 학력이 승진요건에 못 미쳐 만년 사원이었다. 그는 챙겨줘야 할 동생들 마냥 이전과 달리 미주와 영혜를 자주 지켜보았다.
두 친구는 제자리로 돌아와 업무에 충실했지만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몸살이 나 휴가를 내려도 해도 결재가 안되었고 주말을 끼워 쉬려 해도 어디를 가냐고 꼬치꼬치 묻고 증빙사진을 내라는 식으로 강요했다. 혹시나 교통편 예약을 해 어디로 튈까 봐 업무용 PC를 수시로 감시했다.
퇴근이 감옥 탈출로 여겨질 만큼 간절해졌다. 집으로 도저히 곧바로 올 수 없을 정도로 영혜와 미주의 몸과 마음은 지쳐 갔다. 그래서 옥계 시내 맥주집으로 곧장 갔다. 안주를 저녁 삼아 술을 못 마시는 두 친구의 모습은 그곳에서도 편하지 않았다. 손님들은 합석을 강요하거나 야한 농을 던지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술기운에 키가 큰 편인 미주가 열받아 욕을 할 듯 말듯한 소리로 확 내지르며 일어나면 그나마 잠잠해진다.
옆테이블의 끈질긴 합석 요구에 말싸움이 나면 어김없이 내게 전화가 온다.
ㅡ 말빨이 밀려. 얼른 와 우리 구해 줘.
나라고 뽀죡한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하던 일을 챙겨 가방에 밀어 넣고 상관의 쌍소리가 날아와도 주저 없이 친구들 곁으로 갔다. 젊디 젊은 예쁨이 누군가에는 눈요기지만 존중받지 못한 이십 대를 시작하는 우리는 서로를 지켜줘야 했다. 곤경에 처한 친구들 외에는 아무 생각이 안 든다. 우선 도착하면 소리부터 지른다.
ㅡ아악, 여기 사람 죽어요! 이 아저씨들이 우리를 괴롭혀요!!
그리고 챙겨 왔던 서류들을 그 테이블 쪽으로 날린다. 아수라장이 되면 주인은 우선 우리의 적들을 내보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
ㅡ보디가드라도 데려오든지. 웬 어린 여자애들
때문에 장사 다 망치겠어.
우리도 쫓겨났다. 그날의 수확이라면 고병수 씨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워낙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 그날 어디에 앉아 우리를 지켜봤는지 알 수 없지만 미주와 영혜의 보디가드가 기꺼이 되어 줬다. 그것뿐이랴 술 마시는 태도, 안주 즐기는 방법까지 자격증 왕답게 깔끔하게 전수해 줬다.
우리의 마음 해우소가 홍어집으로 바뀐 것은 무슨 운명 같았다. 삭힌 홍어회를 먹다 보면 마음의 화가 삭여지는 게 느껴졌다.
고병수 씨는 술잔에 삶을 담는 것부터 가르쳐줬다.
ㅡ술은 자기가 따라 마셔야 돼. 마음에 고인 물은 덜어내는 거거든. 천천히 붓고 더 천천히 마시는 거야. 그래야 찌꺼기가 안 남아.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회식 자리에서 부서의 꽃을 운운하며 술 따르는 것을 강요받던 우리를 배려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고병수 씨의 말은 귀에 감기듯 마음을 녹여 정말 빈 술잔에 술을 채우면 내 마음에 흘러가지 못하고 고인 아픔들이 따라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급하게 들이켠 날은 속이 쓰렸지만 천천히 조금씩 적시며 마신 날은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술잔을 채울 때 필요한 의식들도 한 두 가지씩 알려줬는데 듣다 보면 웃느라 정신을 못 차렸다.
술잔 채우는 것이 어느 정도 되자 진짜 안주 홍어회가 나왔다. 그전까지는 가볍고 평범한 안주들이라 삭힌 홍어회를 처음 맞닥뜨린 순간 우린 약속이나 한 듯 코를 움켜 잡았다.불쾌한 암모니아 냄새는삭힌 홍어회 접시가 비워지고 나서도 가시지 않았다.
ㅡ냄새나는 생선 중에 홍어는 품격 있어. 냄새 말고는 영양가도 풍부하지. 목 넘김이 부드럽지. 사람도 저마다 냄새가 나. 제대로 삭히느라 나는 홍어냄새처럼 좀 괜찮은 인간이 돼야 하는데 말이야. 그게 어려워. 나조차도 구린내가 날 때가 많아.
젓가락에 집혀 있던 삭힌 홍어회를 두고 고병수 씨는 훈수를 두거나 덕담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얘기를 했다. 그 내용들이 우리가 겪고 있거나 앞으로 감내해야 할 것들인데도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방금까지 모든 감각에 불어닥친 불쾌한 냄새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삭힌 홍어를 입안에서 놀 틈도 없이 삼켜 식도로 밀어 넣는데, 각종 냄새들로 가려져 있던 우리의 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술기운에 움튼 객기보다 삭힌 홍어회가 마음에 고인 물을 따라 낸 자리에 있던 아픔들을 삭여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