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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 Aug 14. 2024

식상하다고 해도 좋아, 난 제비그릇과 동전파스를 사겠어

제비그릇이 뭐라고


무계획여행으로 시작해 쇼핑여행이 되어가는 나의 도쿄 여행 막바지. 셋째날 오후가 저물어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여행 전체가 후회스럽게 기억될지도 모른다구..! 그 소중한 시간을 나는 그릇을 사러 가는 데에 쓰기로 결심했다.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났으면 굳이 그릇을 사러 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제 오모테산도에서 너무 데인 통에 유명한 관광지를 갈 생각은 싹 사라졌고, 나는 근래 몇 달 간 쇼핑몰이며 백화점, 그리고 부모님 댁(..)에서 갖가지 그릇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도쿄에서 뭘 할지 찾던 중에 아예 그릇거리가 있다는 걸 알고 솔깃했다. 일본 가서 그릇쇼핑이라니 좀 그럴 듯하잖아(그런가?)


요리를 그리 좋아하거나 잘하지는 않는다. 그냥 가끔 꽂혀서 새로운 걸 만들면 버리진 않는 정도? 열심히 할 땐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지금은 손이 가지 않는다. 살림을 메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보니 그릇에 돈을 많이 쓰기는 아깝다. 또 그런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왠지 예쁜 그릇을 사려면 그에 적합한 넓고 깨끗한 부엌이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릇을 보관할 진한 색깔의 나무로 된 프레임을 짠 유리 진열장과 그 진열장이 들어가도 좁지 않고 동선이 방해되지도 않는 그런 부엌이. 그리고 그런 부엌이 있으려면 넓은 집이 있어야겠지?^^ 그러려면 역시 전월세로는 부..족..... 하지만 돈이 없....... 이렇게 그릇은 순식간에 '집'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순식간에 나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신기한 효과가 있는 통에 잘 사지 못한다. 마치 그릇 하나가 몇십 억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런만큼 여행을 빌미로 사기에 적합한 아이템 같다.


다만 고등어구이 먹겠다고 점심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버린 지금. 시간은 점점 저녁에 가까워가고 손에는 가득 찬 무지 대형 쇼핑백이 들려있다. 그릇거리는 문을 일찍 닫는다기에(5시쯤?) 거기까지 가느라 고생하느니 깔끔히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에 마침 내가 가장 가고 싶던 가게는 다른 곳보다 한 시간 정도 더 영업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러니까 아마 6시까지). 그렇다고 이 얼마 안 되는 남은 시간을 그 가게 한 군데에 바쳐?


유행을 따라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릇도 마찬가지라 유행한다는 잇템은 좀 제쳐두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릇거리를 찾으면 반복적으로 소개되는 그릇이 있었으니 바로 제비그릇이었고... 한눈에 이미 깔끔 얌전한 것이 예뻐보였고.. 색상이 너무 진하거나 무늬가 요란하지 않아 오래 써도 크게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진을 계속 넘겨 보다가 어느 새 혹해버렸고...


내가 원하는 그림은 이 가게, 저 가게 몇 군데 맘에 드는 곳을 돌아다니며 비교해보면서 몇 개 점찍어 놓은 것 중 고민고민하다가 나만의 그릇을 득템하는 거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뜻밖의 수확 말이다. 제비그릇을 파는 가게에 찾아가서 제비그릇을 사는 전개에 무계획 여행의 낭만이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했으면 안 가기로 마음먹고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갖겠다며 어디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가더라도 가서 내내 제비그릇 리뷰를 찾아볼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느니 낭만을 포기하고 그릇을 택하겠어. 이걸로 정했다. 간다!


가는 길도 간단하지는 않았다. 올 때 탔던 그 버스는 갈 때도 계속 구글맵에 출발 지연이 뜨고, 온다는데 왜 안 오나 했더니 버스 정류장을 잘못 찾아 엉뚱한 곳에서 십 분 넘게 서 있기도 하고, 제대로 된 정류장을 찾자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기 전에 눈앞에서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가 떠나버리기도 하고. 시간은 그 사이에도 계속 흘러가고 있다. 어쨌든 간신히 버스를 탄다. 그리고 긴자 부근에서 다시 혼잡한 지하철로 갈아탄다.


긴자에서 본 닛산 신차 전시. 삼각삼각하네(?)

지하철을 탄 뒤부터는 어렵지는 않았다. 여유로운 탐방은 포기했으므로 아예 목적지를 갓파바시 거리가 아니라 내가 가려는 그 가게(baise)로 찍고 찾아간다.


이쯤부터 아 맞게 찾아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일회용 음식용기가 각종 사이즈별로 진열되어 크기와 가격이 써 있었다. 재밌어서 사진을 찍었는데 가게 사장님이 손님인 줄 알고 나와보셨다. 죄송합니다...


갓파바시의 '갓파'는 그 일본 설화 속의 요괴 갓파다. 거리 여기저기서 갓파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저 날으는 소녀는 뭔지 모르겠네.

시간이 얼마 없어 상당히 빠른 걸음으로 baise를 찾아간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발견! 예에! 휴. 다행히 아직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무거운 쇼핑백을 든 터라 극도로 조심하며 가게에 들어섰다.


... 한 시간 순삭. 나는 다른 가게는 열었어도 가 볼 새도 없이 baise에서 한 시간을 꼬박 보냈다. 도중에 쇼핑백은 카운터에 부탁해서 맡겨두었다.


가게는 3층까지 있다. 1층에 대부분의 그릇이 있는데, 쭉 안쪽 끝까지 들어가면 조금 분리된 공간이 있고 거기에 제비그릇이 있었다. 일단 있는 걸 확인하고 전체적으로 한 번 차분히 구경하기로 했다. 휴. 마음에 드는 그릇을 다 산다면 100만원 정도는 우습게 쓸 것 같았다. 온갖 종류의 그릇이 있다. 손님 초대할 때 쓰기 좋은 접시며 샐러드볼에 각종 귀여운 소스그릇, 티팟에 장식용 병까지.. 가격은 다양했고 전체적으로 괜찮다고 느꼈다. 내가 필요한 줄 몰랐던 그릇까지 격렬하게 사고 싶어지는 가게였다 ㅎㅎ 마음에 든 그릇을 다 샀다가는 그릇 진열장이 아니라 그릇방이 필요할 것 같다.


2, 3층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몇 없었는데, 나는 3층까지 다 올라가봤다. 3층에는 그릇이 많지 않지만 할인 스티커가 붙은 것들이 꽤 있었다. 2층에는 커피용품이 좀더 다양하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주 진한 갈색의 광택이 나는, 약간 르쿠르제 느낌의 특이한 접시가 있어서 한참 고민하다가 내려놓았다. 지금 사는 집은 오피스텔이라 부엌이 좁다. 이런 분을 모시기엔 좀 누추한 느낌이.. 그릇을 갖춰두기 전에 부엌에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가 많은데 나 잠깐 눈물 좀 닦고... (냉동실에 성에가 껴서 주기적으로 녹여줘야 한다. 상당히 번거롭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지금의 부엌을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쌓여서 이 집을 ‘대충 거쳐 가는 곳’으로 느끼게 한다)

결국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가 제비그릇 하나와 조금 비슷한 다른 그릇 하나, 그리고 오묘한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집었다가 뒤집어 보니 예전에 눈여겨 봤던 코스타 노바였던 작은 그릇 두 개를 샀다.

사진은 한국에 돌아와서 찍었다. 제비그릇은 결국 엄마께 선물로 드렸다. (그래서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 애써 구해온 그릇이라 우리집보단 좀더 멀쩡한 부엌으로 보내고 싶었다;; 코스타 노바 접시도 엄마랑 하나씩 나눠가졌다. 나보다 엄마가 그릇을 좋아하시기도 하고. 그릇을 사왔다는 말에 집에 언제 올 거냐고 계속 재촉하셨다. 혹자는 당연히 딸이 보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라 하지만 평소에 그냥 간다고 할 때에 비해 목소리 톤이 훨씬 높으셨는데... 자꾸 그릇 사온 거 맞냐고 물어보시고..? 어머니?


아무튼 신중하게 그릇을 고르고, 뽁뽁이 포장까지 해 받고 tax free도 잘 챙긴 뒤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이제야 갓파바시 거리의 입구 같은 곳으로 왔다. 저 요리사 아저씨가 있는 사거리.




결국 성공적인 쇼핑이었다. 만세! 안 깨먹게 조심하면서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간다. 저녁을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다가 패밀리마트도, 로손도 가봤는데 세븐일레븐에서는 아직 커피만 사고 음식을 사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저녁은 편의점 파티를 해야겠다.


(+ 덧붙이자면, 이렇게 고생해서 사온 그릇 중 하나는 여행 돌아와서 100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위에 클로즈업해서 찍은 저 오묘한 푸른빛이 도는 그릇을 모 씨가 실수로 깨고 만 것이다. 그는 심지어 몰래 넘어가려다가 파편을 남기는 바람에 나에게 들키고 말았다. 내가 그 그릇이 사라진 걸 모를 리도 없지만. 허술한 그는 사과를 하다가 또 가서 사면 되지,라는 말로 허술한 위로를 시도하다가 나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더 허술한 나는 곧 약간 설득당해서 그렇군, 역시 또 가서 사는 수밖에 없군, 하게 되었다. 사진과 이 글이 남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동전파스 찾아 삼만리


숙소에 돌아와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고 배도 채운 만족스러운 저녁시간. 어제 저녁 이렇게 애매하게 남는 시간에 도쿄역 쪽에 갔다가 큰 재미를 못 본 터라 저녁은 더 어디 안 다니고 조용히 보낼 생각이었다.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해봤자 숙소 근처 스타벅스 가는 정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중대한 임무가 마지막으로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전파스 구입이었다.


온갖 관절에 통증을 달고 사는 나는 동전파스를 너무 유용하게 쓴다. 예전에 엄마에게 받은 것을 오랫동안 잘 쓰다가 얼마 전 똑 떨어져 불편하던 참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일본여행을 오기로 마음을 정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도쿄 가면 뭐 살 거냐고 물어볼 때도 제일 먼저 동전파스라고 답할 정도로.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들 선물은 다 샀는데 나에게 제일 필요한 동전파스를 아직 못 산 실정이었다.


동전파스는 사실 어제 신주쿠 LABI에서도 봤었다. 보인 김에 바로 살까 싶었지만 아직 오후 일정이 한참 남았던 터라 짐을 늘리기가 싫어서 뒤로 미뤘다. 신주쿠 한복판이라 다른 데 가면 더 싸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뭐 얼마나 차이가 있겠냐마는). 그리고 그냥 사진만 찍어두고 다른 데로 이동했다.

신주쿠 LABI에서

그리고 아까 아리아케 몰에서도 잠시 동전파스를 지나쳤는데 가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그래서 숙소 근처 드럭스토어를 찾아나섰다. 신주쿠보다 낮은 가격을 기대하며 갑자기 알뜰모드인 내 자신을 칭찬하며.


그런데 웬걸.


?!!

생각보다 가격 차이가 큰 것이었다. 거의 300엔이나. 아니 만 엔짜리 물건도 아니고 천 엔 전후하는데 300엔이 왔다갔다 하다니? 아직 내가 뭘 잘못 알았나 싶지만 어쨌든 이미 신주쿠에서 836엔을 봐 버린 알뜰모드의 나는 1,180엔 짜리에 도저히 손이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주저주저하며 갈 길을 잃은 채로 빈 손으로 가게를 나섰다. 이걸 어째?


황급히 구글맵을 검색하니 서둘러 도쿄역 쪽으로 가면 그쪽에 있는 LABI에 문 닫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날 도쿄역에 도착했고, 둘째날 저녁 먹으러 갔다가 실패했고, 넷째날인 내일 공항 가는 버스를 타러 또 가야 하는데 오늘마저도 도쿄역에 가야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도쿄역에 가게 된 상황이 얼척없었지만 어쨌든 출발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나마 경로라도 오늘은 숙소가 아니라 근처 드럭스토어에서 출발한 덕에 계속 가던 길이 아니라 조금 다른, 동네 한복판의 길로 가보게 되었다. 한 눈으로는 운치 있는 동네 풍경을 감상하며 LABI가 닫을세라 속도를 내어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드럭스토어와 마트의 중간 정도로 생긴 가게가 눈에 번쩍 띄었다. 약간 허름하지만 깨끗하고 제법 큰 그 가게는 어두운 거리에서 혼자 밝게 불이 켜져 있었고 이제 막 친절하게 생긴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가게 입구를 정리하는 참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Are you open?을 외쳤고, 사장님은 five minutes!라고 답했다. 5분이면 충분하다! 게다가 이렇게 간결하고 명확한 의사소통이라니!


나는 있는지나 보자, 있으면 가격 조사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가 빠르게 동전파스를 찾았고 결국 878엔 짜리 동전파스를 찾아냈다. 신주쿠보단 좀더 비싸지만(아직도 왜 신주쿠가 제일 쌌는지 의문) 이 정도면 훌륭하다. 빠르게 내가 두고 쓸 것과 선물 줄 것까지 넉넉히 집어서 계산대로 향한다. 큰 소리로 감사인사를 하고 이제야말로 의기양양하게 가게를 나가는 내 뒤에서 계산원과 아까 그 사장님이 뭐라고 대화를 한다. (저 손님 그렇게 급하게 들어와서 뭘 사간 거냐고 한 게 아닐까 상상했다) 과연 5분이면 충분했다.


그 가게는 급하게 들어가서 숙소와 도쿄역 사이 어딘가라는 것 외에는 위치도 모르고 가게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찾아가라면 전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갑자기 나타나 나의 동전파스 수급 사태를 단박에 해결해주다니. 마치 기적 같았는데, 이런 행운을 동전파스 사는데 써버리나 싶으면서도 아무튼 단순하게 기분이 좋아져버린 나는 동네를 잠시 걸으면서 스타벅스는 이미 닫았고 근처 다른 카페라도 가볼까, 하다가 그냥 숙소 로비를 잘 활용하기로 한다. 음료수를 하나 사서 로비 테이블에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뭘 한 것 같기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한 도쿄여행이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특별히 한 것도 없지만 잘 지낸 3일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 와서 앞날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을 하려고 했던 것도 같지만 그럴 새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3일이 지나갔다. 괜찮다. 3일간 큰 사고 없이 골치아프지도, 속상하지도 않게 보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길을 찾고, 걷고, 먹고, 이런 기본적인 일에 신경쓰느라 그 이상의 생각은 할 여유도 그리 없는 것, 어쩌면 이게 여행의 장점이고, 3일간 일상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셋째날의 끝. 내일은 귀국이다.

아리아케몰 - 긴자역 - 그릇거리 - 동전파스를 착한 가격에 파는 위치불명의 가게 - 숙소


아무래도 둘째날만큼 많이 걷진 않았다. 그 전날의 여파로 물집이 잡혀서 발이 아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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