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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Mar 18. 2024

남기지 않고 떠나자

죽음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나요?

20대 중반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남해로 드라이브를 간 적이 있었다. 그즈음에 (프로그램 이름이 기억 안 나지만)한 병원의 응급실 모습을 촬영한 다큐 영상을 인상 깊게 보았는데, 큰 사고를 당해 대수술을 앞둔 환자의 가족에게 의사가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 가족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문득 떠올라 아빠에게 질문했다.


“아빠. 아빠는 내가 큰 사고를 뺑소니든 뭐든 당하게 되면 가해자 용서할 수 있어?”

“(2-3초간의 침묵 후)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냐? 별로 안 좋은…”

“아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만약에 그러면 아빠는 어떨 거 같아?”

“글쎄. 아빠는 아무래도 용서 못하지.”

“음… 나는 아빠가 결국엔 그 사람을 용서해 줬으면 좋겠어.”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은 분명 아니어서 그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것은 분명 인류애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불가항력적으로 떠나보낸 이들이 잘 살아가려면 그 마음에 분노를 남기지 않아야 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오래 담고서는 온전히 그 삶을 살아가기 힘들다.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려면, 사랑했던 사람과 잘 이별하려면, 마음 안의 부정한 것들을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한다.


20대 후반 어느 날에는 내가 죽은 후에 내 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장기 및 조직 기부를 결정하고 등록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죽은 내 몸을 어떤 형태로든 물질적으로 보관하면 그것을 누군가는 관리하고 살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죽은 나의 몸을 보관하고 싶지 않다. 기능을 다 한 내 몸(혹은 사고로 장기 기증을 해야 하는 경우든 간에)에서 어딘가에 필요하고 사용가능한 것들은 그곳으로 보내고 물리적인 나의 형태는 태워 사라지게 하고 싶다. 무덤이나 유골함, 심지어 나무 묘지 등 어떠한 보관 형태로도 남기고 싶지 않다. 그럼 누군가가 기억하고 찾아가고 싶을 땐 어떻게 하냐고? 나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은 마음 만으로도,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내가 죽은 후에 나의 흔적을 물리적으로 남기는 일은 어떠한 면에선 불필요하다는 생각에 장기와 조직 기증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장기, 조직 기증 등록 후에 그때 함께 근무했던 동료에게 사실을 알렸더니 부모님과 상의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혼자 결정했는데…”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지만 내가 부모라면 서운하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이상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깊게 고려하지 못한 터라 동료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일리가 있다 싶어 아빠에게 사실을 알리지는 않고 슬쩍 물어보았다.


“아빠. 내가 장기기증 등록한다고 하면 아빠는 반대할 거야?”

“아빠는 그거 좀 반대인데. 다른 사람이 딸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거 같아서 싫다.”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등록 사실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아마 아빠는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한 걸 보니 딸내미 성격에 당연히 했겠지라며.


죽음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대부분 왜 그런 얘기를 갑자기? 이거나 별로 안 좋은 이야기 그만하는 게 좋다 인 것 같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조금 다르다. 나에게는 죽음이, 죽은 후에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획하는 건 재수 없는 일도, 안 좋은 일도, 무서운 일도 아니다. 물론 죽음은 두렵고 반갑지 않은 존재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떠난 후의 모습, 즉 나를 물리적으로 남기지 않고 떠날 때 후회 없이 담담히 가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오늘을 나답게 흡족히 잘 살아가자는 다짐이고 주어진 삶에 긍정하는 것이기에 나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내 생활 전반에 묻어난다. 새 옷 더 이상 사지 않기, 필요 이상으로 신발 사지 않기, 주방 도구와 식기는 필요한 만큼만 쓰고 새것 사지 않기, 침실은 최대한 간소하게, 가장 작은 사이즈의 냉장고를 사용하면서 식재료와 음식을 쌓아 놓지 않기, 생일 선물 받지 않기, 주변 사람들에게 후회할 말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아빠와 할머니에게 서운한 것과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 평소에 잘 표현하고 아끼지 않기 등등.


이제부터 남기지 않고 떠나기 위하여 실행하는 것들에 대해 기록해보려 한다. 내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고 결국 후회 없이 살고 나중에 떠나야 할 때 잘 떠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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