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이 오고 있지만 날이 차고 독감환자도 늘고 있었다.
우리 교실에 어머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한 명씩 결석을 돌아가며 결석을 하셨다.
나는 어머님이 안 오시는 날은 꼭 전화를 돌린다. 대부분의 학습자들이 혼자 살고 계셔서 근황을 전해 줄 사람이 없다.
“어머니! 잘 지내시죠? 이번 주 수업에 안 오셔서 전화드렸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탁하고 힘이 없었다.
“선생님인교? 내 당분간 못 갈 것 같아요. 기관지염이 심하다네. 기침도 조금씩 하고....... ”
어머님은 수업을 못 온 것이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이고 어머님. 수업보다 건강이 우선이에요. 푹 쉬면서 약 잘 챙겨 드시고 빨리 쾌차하세요.”
찬바람이 따스한 햇살을 시기하듯 불다가도 이내 사그라들고, 봄은 어느새 중턱을 넘어섰다. 교실에도 한낮의 햇살이 길게 드리웠지만, 어머님의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는 달이 차고 달이 지나도 주인이 찾지 않았다. 간혹 전화도 드렸지만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할머니의 근황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학습자의 연령대가 고령이다 보니 한 주를 안 오셔도 늘 걱정되고 안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이번처럼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게 기다리며 계절이 바뀌어 갔다. 봄은 짧고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익숙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오래도록 그리웠던 얼굴이 들어섰다.
“어머니! 너무너무 반갑습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안부를 물었다. 많이 여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건강한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
할머니와 인연은 몇 해를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경로당에 한글 수업을 하러 갔을 때 유난히 학습에 열정을 보이셨다.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도 쓸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쓰기 시작하면서 한글 공부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
“우리 할배가 내 이름이라 했는데 요래 쓰는 줄은 몰랐구먼..”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고 또 쓰며 쓸 수 있을 때까지 또박또박 쓰셨다.
그날 이후 어머님은 공부에 더 흥미를 가지셨고, 수업시간에는 늘 앞자리에 앉아 남들보다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 세계에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학습은 중단되었다. 이후 코로나상황은 조금 나아져 수업이 재개됐지만 이 경로당에서는 더 이상 학습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할머니는 남은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조금 떨어진 지금의 학습장을 찾아오셨다. 이곳에서도 당신의 학습이 뒤떨어질까 조심스레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늘 연세가 많으셔서 한 해 한 해 할머니의 안부가 걱정되었지만 건강하게 잘 다니시다가 올봄에 기관지염으로 고생을 하셨다.
자녀들이 이 고장에 살고 있지 않아서 서울에 있는 딸 집에서 지내셨다고 한다. 그곳 병원에서 생활을 하다 딸이 갑자기 중병이 생겨 할 수 없이 내려왔다고 한다. 아직 병이 다 나은 것이 아니라 얼굴 보러 잠시 왔다고 했다.
“공부는 다시 하고 싶지만, 기력이 달리고 진도를 못 따라갈 것 같아요”
할머니가 주저주저하다 말씀하셨다.
“형님! 그냥 오이소. 집에 혼자 있으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고 건강이 안 좋아지니 그냥 오이소.”
함께 공부했던 학습자들이 할머니가 학습에 함께 참여해 주길 바랐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할머니는 다음 날부터 가방을 들고 학습에 참여했다.
학습에 따라오기 힘들어하셨지만 세심한 신경을 쓰며 할머니의 읽기를 도왔다.
수업이 끝나고 할머니는 가방 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셨다. 서울 딸이 써 준 편지라고 했다.
서울 딸이 써 준 편지에는
“어머님이 방광염으로 항생제 2알과 위장약 1알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
할머니는 이 편지를 들고 읍내 의원과 시내의 산부인과 등을 전전긍긍하며 다녔다고 한다. 시골에는 병과가 구분되어 있지 않아 할머니들은 조그만 읍내 의원에서 필요한 약을 타 드셨다. 할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읍내 의원에서 약을 드시기에는 심각한 병이었다.
“어머니, 병원을 잘못 찾아가셨어요.”
나는 비뇨기과를 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비뇨기과가 어떤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병원의 위치를 가르쳐 드렸지만 찾아가는 길을 떠올리지 못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비뇨기과 병원에 모셔갔다.
“지난번 병원 옆이라서 이젠 찾아올 수 있겠어요. 이젠 혼자 올 수 있겠네.”
그렇지만 할머니가 첫 진료를 원만히 받을 수 없어 그 뒤로 몇 차례 더 병원에 함께 다녀왔다.
어머님은 난생처음 가 보는 병원이라며 자식들이 멀리 사는 것이 외롭고 불편할 때도 있다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내 병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을 건데 고마워요."
어머님을 집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오는 길, 날씨는 덥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흐렸다.
문득, 내가 하는 이 일이 ‘가르침’이 아닌, 누군가의 삶에 함께 머물러 있고 때론 가장 가까운 딸 입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