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운명이 반복되는 이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자살시도를 하고 내게 오게 된 린.
린은 평범한 직장인 여성이다.
6개월 간 상담을 꾸준히 하며 자살시도는 멈춘 상태지만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지금도 아슬아슬하다.
“선생님. 남친이랑 또 한바탕 했어요.”
그 남친은 린보다 20살 많은 유부남이다.
남친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
남친을 들들 볶다가
힘들어하던 남친이
린을 떠나면
남친을 찾아가
다시 만나 달라고 애원하는 린.
남친이 다시 안 만나겠다고 하면
때리고 부수고 협박하고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 린.
"또 신발 던졌어?"
"아니요. 이번엔 다른 거..."
"뭐?"
"양말. 너무 열받아서 신고 있던 양말 던졌어요."
"어쩌니. 남친이 전생에 세탁기였나보네."
아름다운 린...
처음 린을 봤을 때 연예인인 줄 알았다.
린이 걸친 싸구려 티셔츠는
린이 입었기 때문에
수백 만원짜리 명품이 되곤 한다.
큰 눈동자에
립스틱도 바르지 않지만
늘 입술이 붉은 린.
상담을 하며
이토록 아름다운 내담자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이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린 뿐이다.
유부남이 아니라
멀쩡하고 멋있는 사람을 만나도
얼마든지 자기가 차버릴 수 있는 린인데
언제나 차이는 건 린이다.
"찾아갔어?"
"네."
"그럴 줄 알았어."
"다시 만나 달라고 했어요. 당신 없이 살 수 없다고 말했어요. 정말 저 그 사람 없이 못 살아요. 가는 그 사람 다리를 붙잡고 안 놔줬어요. 개처럼 질질 백 미터는 끌려갔어요."
"근데... 린."
"네?"
"지금 말한 거..."
"왜요?"
"닮지 않았어?"
"뭐가 닮아요?"
"정말... 기억 안나?"
잠시 말이 없던 린이 기억이 난 듯
말없이 눈을 감았다.
"기억...나지?"
린이 눈을 뜨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린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렸을 적 이혼을 했다.
바람을 폈던 아버지에겐
혼외자가 있었다.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다
집을 떠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건
엄마가 아니라 린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떠났고
린은 버려졌다.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은
아이의 마음에 구멍을 뚫는다.
구멍을 채워 넣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아이는 그 행위를 재연한다.
남자친구는 아버지가 되고
떠나는 아버지를
린은 붙잡는 것이다.
이제껏 만나온 남자친구와 같은 패턴을
반복했던 린.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은
린에게 익숙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남친에 대한 집착을 낳았고
집착은 남친을 힘들게 했고
결국 남친으로부터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게했고
그리하여 린은 스스로 버려진 아이가 될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든 굴레 속에
자신을 가두고 운명을 반복하며
우리는 세상을 원망한다.
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린을 보며
나는 진실을 말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린... 넌 아빠가 아니라 남자친구가 필요한 거야."
"선생님..."
"응."
"좋은 아버지 같은 사람만 봐도 마음이 힘들어요.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나요.
그건 저한테만 없는 거였어요."
린은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린에겐 아버지가 너무 필요했다.
"당연해. 그럴 수 있어. 네게만 없던 거였으니까."
"..."
"근데 이젠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찾아도 돼.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으로 사랑하지 않아도 돼."
"그게 어떤 건지 몰라요."
"일단... 어른이 되어야 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고
나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자라야 해."
우리의 시간은 가장 아팠던 그곳에서 멈춘다.
우리는 아이가 되어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바라며
아직도 부모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겹도록
반복되는
짝사랑.
인생을 지연시키는 굴레.
고통스런 시간.
그 멈춰 있는 시간에서
빠져나와
자라야한다.
나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채워야 한다.
내부로부터 나를 채워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때
그때 사랑할 수 있다.
자라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고된 훈련이다.
그러나
한 걸음씩 나아가는 한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을 찾는 그대여
부디 포기하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