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하지말아요.
내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스물 여섯 살 정인이는
뭐랄까...
지금 이 공간에 섞여서 보이지 않는 배경 같은 아이다.
살아 있지만 죽은 듯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아이.
"정인아."
"네."
"그냥 불러봤어. 너 여기 정말 있나 확인하려고."
"아..."
날 보며 어색하게 웃는 정인이.
늘 어딘가로 숨고 싶은 아이.
숨는 것이 불가능할 땐
현실의 배경과 같은 색으로 자신의 옷을 갈아입는 아이.
정인이의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다.
20년이 넘도록 술에 찌들어 사는 아빠는 지금까지
정인이 엄마와 정인이, 어린 남동생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언어폭력과
생활비 한 번 주지 않는 경제폭력을 일삼곤 한다.
늘 엄마와 남동생이 불쌍한 정인이.
폭군이 점령한
집에서
자신도 지킬 수 없었으면서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남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짓눌린
정인이.
언제나 그렇듯 정인이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연다.
"선생님 어제 알바 갔다가 늦게 집에 왔는데요
아빤 술 먹으러 나갔고
엄만 일하러 갔고
동생은 자고 있었어요.
집이 너무 조용했어요.
항상 집은 사막 같은데... 그래도 아리엘만 저를 반겨줘요.
아리엘도 친구가 없어서
저 오면 항상 반겨요. 지느러미로 막 왔다갔다 하다가 벽에 머리도 박아요.
얘가 정말 절 반기는구나... 느껴져요.
근데 어제는...
아리엘이 저를 반기지를 않고..."
곧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정인이 얼굴을 숙인다.
나는 휴지를 건네며 정인이에게 물었다.
"너를 안 반겼다고?"
"네."
"왜?"
"배고파서... "
"뭐?"
"배고픈데 넌 주인이면서 밥도 안주고 갔냐고... 진짜에요 저를 그렇게 쳐다봤어요."
정인이가 키우는 물고기 아리엘.
말 못하는 물고기도
자신을 탓한다고 생각하는 정인.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정인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느낄 수 있었다.
사소한 것에도
비난과 정죄를 받는 무참한 곳이
정인이가 사는 세상이었다.
성인이 되면 세상에 나가
돈, 관계, 일...을 경험하며 진짜 전투를 벌인다.
부모가 자신에게
정서적인 보호, 지원을 해주지 못한다고 느끼면
세상은 그들에게 공포가 된다.
그들은 세상과 맞서 싸울 수 없다.
다쳐봐야 보호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방어적으로
눈치를 보며 죄인처럼 살아간다.
'잘했어.'
'이만하면 됐어.'
'다음에 잘 하면 돼.'
이런 언어 자체가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탓이야.'
'죽고 싶어.'
'내가 못해서 그래.'
두려움의 언어로 그들의 세계는 꽉 차 있다.
죄책감의 감정은
정인이가 어렸을 때부터 늘 느껴왔던 감정이다.
오래된 감정은
몸에도 진득이처럼 들러붙어 있는데
자신의 잘못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내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여
그러한 감정을 쉽게 느끼는 것이다.
나는
약을 먹이는 심정으로
몸에 주사를 밀어넣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정인아. 아리엘에게 미안해하지마. 또 있어. 엄마에게도 미안해하지마. 그리고 남동생에게도 미안해하지마."
"..."
"네 잘못 아니야.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보호받지 못한 건 너야."
정인이처럼
당신도 죄책감에 괴로워한다면
당신이 당신에게 가혹하게 구는 것을 멈추길 바란다.
당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당신도 보호받았어야 했다.
그러니
당신을 가엾게 여겨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