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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갈 건데... 좀 도와주실래요?

병은 집에서 심화되고 깊어진다.

by 지영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픈 아이들에게는 치유되지 않은 부모가 있다.


그러나 상담은 부모가 아닌 아이들이 받는다.

가정 안에서 아이들의 질병은 심화되고 깊어진다.


일주일에 한 번 전화로

설아의 새엄마와 부모상담을 했다.

설아의 상태가 어떤지,

부모로써 어떤 협조를 해줘야 하는지 알려줄 의무가 내게 있기 때문에.


“설아가 우울감이 심하네요. 일을 할 에너지 자체가 없어서 취업을 하기엔 무리입니다.”

“우울한 거 알아요. 몇 년째 약을 먹고 있는데 똑같아요. 자기방 청소도 안 해요. 칫솔질도 안 한다고요.”

“행동보다 마음을 좀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힘들다고 하던가요?”

“아버님 이혼했을 때 좌절감이 컸던 것 같아요. 그때 설아 옆에 아무도 없었고 설아는 지금도 집에 있으면 아무도 자기편이 없다고 느껴요. 밖에서도 외롭지만 집에서도 외로운 아이에요.”

“그럼 지금 힘드니까 이대로 있어라...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이렇게 해야 되나요?”

설아는 그녀에게 문제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그녀에게 늑대 얘기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울증은 병입니다. 병든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부모님과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으면

답답하고 절망스럽다.

이런 감정은 설아가 늘 느꼈을 감정이었을 것이다.


상담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면서

설아의 눈에서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져갔다.

자신의 성장배경을 이해하고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가면서

설아는 자기 안에 있는 자기혐오와 자기비난의 목소리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져갔다.


“선생님 아빠는요 제 말 말고 아줌마 얘기만 들어요.”

“...”

“완전 눈이 먼거죠.”

“그런 것 같네.”

“어제 친구 집에서 게임했는데 아빠한텐 혼자 영화봤다고 했어요.”

“그랬구나.”

“아줌마가 티켓 보여달라고.”

“뭐?”

“...”

“그래서?”

“들켰어요. 거짓말한 거.”

“야.”

“...”

“너... 좀 능숙하게 못하니? 친구가 내것도 끊어줬다. 그래서 없는 거다...”

“아... 그러네.”

“설아야~~~.”

“주말에 외출할 건데 아줌마가 돈을 줄지 모르겠어요. 이젠 더 압박을 해오겠죠.”

“넌 스킬을 키워야 해.”

“선생님.”

“응?”

“저요.”

“...왜?”

“집 나갈 건데... 좀 도와주실래요?”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살아온 설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저 뭐부터 해야 하죠?”

“너 말야...”

“네.”

“돈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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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위해 설아와 내가 세웠던 작전은

1. 돈(월세 보증금)을 모을 것.

2. 게임을 줄이고 운동을 할 것.

3. 감사일기를 쓸 것.

이었다.


설아는 일용직으로 쿠팡 물류센터에 나가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힘든 곳이라 하루 만에 포기할 줄 알았는데

설아는 하루 일을 하고 이틀을 쉬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그곳에 나갔다.


“선생님 저는요 쿠팡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면 존경스러워요.

거긴 다 있어요. 머리가 하얀 아저씨, 아줌마도 있고 저 같은 애들도 엄청 많아요.

힘든 일을 참고 하잖아요. 다들 정말 대단해요.

그래서 관리자한테 느리다고 혼나도 하나도 기분 안 나빠요.”

“그 관리자가 차은우 닮은 건 아니고?”

“아 진짜라니까요.”

“쿠팡에서 상 줘야 해.”

“그니깐요.”

“밥은 먹니?”

“안 먹으면 일 못해요. 식당에 이백 명은 있는 것 같아요.

밥이 사료 같은데 그래도 먹을만 해요.”

“대단하다.”

“저 대단한 거 맞아요. 살다가 이렇게 제가 저한테 칭찬한 적은 없었어요.

설아, 너 진짜 열심히 살았어. 오늘 너 진짜 열심히 산거야...”

“맞아, 인정해.”

“선생님 제가요.”

“응.”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어요.”

“뭐?”

“우울한 사람들 있잖아요. 저처럼.”

“응.”

“쿠팡가면 돼요. 몸이 힘들어야 정신을 차리는 거라구요.”

“진짜 엄청나다... 그래서 돈은 좀 모았어?”

“아주 많이.”

“좋겠다.”

“저 상담 안 오면 가출한 줄 아세요.”

“그럴게. 집 나가서 게임만 하지 말고.”

“말했잖아요. 집에 가면 바로 뻗고 잔다고... 게임은 힘들어서 하지도 못한다고.”


자기혐오와 자기비난 속에서 힘들어하던 설아가

스스로를 칭찬할 줄도 알았다.

가출을 할 수 있도록 도왔을 뿐인데 설아는 일을 했고 게임을 줄였다.


설아가 돈을 벌기 시작한 지 다섯 달이 넘은 어느 날.

말도 없이 설아는 상담에 오지 않았다.

설아의 새엄마로부터 전화가 왔고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아가 가출했다고 했다.


설아가 잘 지내는지 나는 모른다.

새엄마에게 잡혀 다시 집으로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이라는 벽에 부딪쳐

더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지도...


늑대들이여

제발 죽지말기를...

꼭 살아 있어주기를!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다른 고향을 찾을 수 있기를.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고

미움과 증오는 독이 되므로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를 위해

...집을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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