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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Aug 26. 2024

폐허

흰나비를 보면 흰나비가 죽는다는 속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 황지우, <뼈아픈 후회> 중에서          


정확한 시점이라면, 모르겠다. 한시도 너에게 관심을 두지 않은 일상이 없었는데, 너는 그렇게도 큰 존재를 어디로 삽시간에 빼돌린 걸까.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둔 철제 상자, 그 속에 그득히 들어찬 쪽지들은 죽은 듯이 말이 없었다. 어제저녁 연락도 없이 학교에 오지 않았던 너를 찾으러 집 앞에 갔을 적에, 영화 크레딧 올라가듯 점점 폭이 줄어드는 주홍빛 하늘 아래서 나는 너 대신 네 집 앞에 버려져 있었다. 대문 앞의 우편함 속에 들어있던 검은색 철제 상자를 안고서. 갑자기 이 집 주변의 시간만이 파삭 낡아 버린 것처럼, 아무도 없는 집은 이제 막 발굴된 유적 마냥 어딘가 무너지고 삭막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있었다.


나는 몇 번 너를 외쳐 부르다 말았다. 그런 기대감조차 전해지지 못할 모습이었으므로. 대체 어딜 간 거니, 간다는 말도 없이. 울렁이는 뱃속의 울음에는  서러움보다 무언의 기시감이 녹아 있었다. 언젠가 이 같은 일을 겪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마주하게 되리라 짐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현관문 앞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녹슨 뚜껑이 잔뜩 끼어있는 먼지들과 마찰하는 소리가 오싹했다. 그에 비해 안에 든 것들은, 금방이라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 새하얀 쪽지들이었다.


한때 쪽지를 보낼 수 있었던 옛날이 좋았지. 너를 알았던 처음부터 너 몰래, 스스로마저 속이는 마음으로 열심히 접어 보냈던 쪽지들. 시답잖고 일방적인 말들이었겠지만 쪽지를 보내는 일이 좋았던 , 너에게 답이 올 거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너를 아무리 동경하고 사랑해도 네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네가 나를 영영 모름으로 나 또한 너무 멀리서 떠돌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 너는 결국 언젠가는 그 모든 말들이 나였음을 알게 되었을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괜찮았다.


이메일이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 즈음, 네가 읽을지도 모르는 편지에서 읽을 수 있는 편지가 되어버린 때에, 내 조잡하고 어린 구애는 멈추었다. 얼마 안 가 부피가 커질수록 감추기 더 쉬운 것에 대해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한때 나에게도 그렇게 날리는 대로 곧잘 날아가곤 하던 마음이 있었음이 믿기지 않기도 다.


수취인불명. 돌아오지 않는다면 닿지 않은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속속들이 돌아오던 것을 내가 받지 던 걸까. 반질반질한 쪽지들을 손끝으로 매만진다. 너는 이렇게 다, 여기 잠가두고. 여태 밖으로 조금도 새지 않도록.


다시 한번 집을 돌아본다. 너는 여기 없다. 너는 네 묻힐 곳을 찾아 떠날 거라고 언젠가 말한 적이 있었다.


불현듯 일련의 숫자들이 떠올랐고, 그것은 너의 집 비밀번호였다. 금기시된 암호에 손을 댄 양 잠금장치에서 경고음이 크게 울릴 것만 같았으나, 누른 그대로 손잡이는 부드럽게 돌아갔다. 철제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안으로 들어섰다. 쉽게 나를 맞아들인 것치곤 너무 고요한 너의 집은, 오랫동안 누구도 속에 담지 않았던 것처럼 서늘하고 공허했다.


어제까지, 혹은 엊그제까지는 분명 네가 그 속에 살았을 텐데. 평소와 다름없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이 고독스러운 어둠을 구석 끝까지 물렸을 텐데.


휑한 거실을 둘러보다가 안방에 닿았다. 네 방은 따로 없었고, 안방과 창고로 쓰는 다른 작은 방 하나만이 있었다. 안방에는 커다란 옷장이 두 개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텅 비어 있었다. 옷가지 대신 채워 넣을 공기 한 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도 급히 떠날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래. 다른 하나의 옷장 손잡이에 한 손을 올려두고, 크게 숨을 집어 먹었다. 무심코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옆구리에서 상자가 빠지며 바닥에서 시끄럽게 나뒹굴었다. 방바닥에 쏟아지는 하얀 쪽지들. 그리고 또 하나의 빈 옷장을 메우고 있는 것은, 흰나비들이었다.     


- 저기, 흰 나비다.     


꼭 그만큼 흰 손가락이 가리키던 방향으로, 흰나비가 운무를 추던 언젠가의 봄. 아직 여름이 시작되지 않았던, 고개를 돌리던 내 눈을 네 손이 덮어버린, 흰나비를 보면 죽는다는 속설에 대하여 처음 들었던, 그 때문인지 내 삶에서 깎여나간 것은 조금도 없었던.


그때의 그 흰나비.


무덤처럼 쌓여있는 흰나비 박제 표본들 위에서 시선이 속절없이 미끄러졌다. 갑자기 맞닥뜨린 수많은 죽음에 숨통이 막혔다. 그것들은 죽은 속설로도 충분히 나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투명한 유리판들 아래 상쇄될 빛이라곤 조금도 없이, 우연찮은 물빛 한 점 없이, 가장자리마다 샐쭉한 핀으로 고정된 메마르고 싸늘한 주검들. 도로 옷장 문을 닫고 주륵 주저앉았다. 너에게 이런 취미도 있었나. 내게 흰나비 속설을 일러줄 때부터?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끌어안고 있었던 거니. 어쩐지 네가 일종의 작은 추모식까지 열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과히 이상하지도 않았다. 너는 늘 죽음을 살아있는 생처럼 언급하는 사람이었으므로.

 

- 흰나비 보면 죽는다던데.

     

그러나 여기 죽어있는 건 온통 흰나비뿐이잖니.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 곳에서.


옷장 안에서 표본들이 몇 개 무너지는 소리가 덜그럭거렸다. 비밀로 할 작정은 아니었다는 양 굳건히 닫혀있는 옷장 문이 너만큼이나 고집스럽고 능청스러워 보였다. 시간이 끊긴 듯한 고요 속에서, 나는 그런 네가 미친 듯이 보고 싶어졌다. 어디로 무엇이 너를 데려갔는지 상관없으니 이렇게 남김없이 앗아가지는 말라고-그 어느 때보다 불안에 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방법도 길도 모른단 말이야.


더는 그림자가 잠길 햇빛과 노을마저 없게 되고서야,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쩌면 이제야 다 저문 것이려나.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고쳐 신고 뒤를 돌아보니, 일자로 난 복도 저 편에 문이 활짝 열린 작은 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커다란 창문이 덩달아 열려 있어, 창틀 안에 갇힌 바깥 풍경은 꼭 액자가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문을 닫자마자 집이 통째로 푹 꺼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열려 있는 우편함을 잠그고 상자를 옆구리에 다시 낀 채 큰길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온 것이 어제. 그리고 오늘도 역시 너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하루 만에 나는 어제의 혼란을 잊었다. 네가 혹시 집에 돌아와 있지는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은 자연스럽게 휘발하고 없었다. 창문을 열면 공중에 뭔가를 휘두르는 듯한 어떤 바람의 울음이 떠다녔다. 창가의 시야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뒷산 중턱 어딘가를 넘겨다 보았다. 함께 묻은 것들이 아직 뭔가가 되어가기도 전인데. 너와 타임캡슐을 묻은 뒤 다음 날, 혼자 다시 산을 올라 미처 묻지 못했던 나의 물건들을 마저 두고 온 일을 생각했다. 아직 뭔가 잊히기도 전인데. 결국 너는 거기 묻지도 못했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부질없어지지 않았는데.


어디서 휘파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곡조였으므로 그것은 필시 네 것이었다. 흰나비처럼, 낙엽이 되지 않는 나뭇잎처럼, 팔랑이다, 뜸했다, 고꾸라지는.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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