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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Aug 26. 2024

타임캡슐

나중에, 뭐든 말해줄게.


우리가 여름에 채 질리기도 전에 날씨는 제가 먼저 차게 식어버렸다. 겨우 여름 하나 저물 때가 되었을 뿐인데, 해가 다 끝나가고 있다는 기분에 상심해졌을 무렵. 왜인지 타임캡슐을 묻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네 손에 붙들려 끌려오다시피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학교 뒤편에 자리한 작은 산은 높이에 비해 제법 과도한 경사를 자랑했다. 가끔 원예 동아리에서 식물 채집과 같은 활동을 이유로 오르는 것 외엔 학교 학생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오르막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박혀 있는 말뚝으로 연결된 두꺼운 밧줄을 잡고, 너는 그 여린 손과 다리로 나보다 앞서 잘도 올라갔다.



오르는 일에만 집중한 나머지 어느새 평탄한 지점까지-아마도 정상일-오르고 나서야 이상한 점을 느꼈다. 우리,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손에 든 것이라곤 학교 창고에 나뒹굴던, 손잡이가 빠져버리고 없는 작은 삽뿐이었다.     


- 다 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무래도 나만 한 것 같아 보인다. 너는 두 팔을 펼쳐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며 크게 숨을 쉬었다. 솜사탕을 휘저어놓다 만 듯한 구름이 그 한기에 놀라 속도를 늦추어 갔다. 나는 그런 너를 내버려 두기로 하고 우리가 와있는 곳을 대강대강 둘러보았다. 몇 개의 둔덕들이 불거져 나와 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석 하나 없는 무덤들. 누구도 관리하지 않은 무성한 시간들이 그것들을 짙은 푸름으로 뒤덮고 있었다. 두서없이 사방으로 삐친 들은 얼핏 위협적으로도 보였으나, 실은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문드러질 것이다. 그것들에겐 달리 누군가를 새로이 경계할 만큼의 마음은 이미 녹슬어 없을 것이었으므로.

    

- 무덤이겠지?


- 학교에서 키우던 토끼랑 닭들 무덤이라고 들었어. 관리인 아저씨 그만두시고 나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금방 죽어나갔다더라.     


너는 잠시 애도하는 듯한 눈길로, 동조 없이 침묵하는 무덤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네가 묻어준 건 아니겠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말은 않았다. 삽 머리로 땅을 쿵쿵 찍으며 마땅한 자리를 찾아보는데, 네가 미리 봐 둔 곳이 있는지 나를 잡아끌었다. 무덤들이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옆 풀숲으로 돌아나가니 학교 밖 풍경의 일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드러났다.


길이도 짧은 건물들은 듬성듬성한데, 아스팔트를 사이에 두고 가장자리에 즐비한 포플러 나무들이 마치 그 자리를 채우려 억지로 선 듯 많이들 푸석해진 이파리를 힘겹게 흔들며 서 있었다. 너는 그쪽이 아니라는 듯, 바깥을 내려다보며 선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발로 디디고 선 쪽에는 뭔가를 들어낸 듯한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다.      


- 여기?     


- . 뭐가 있던 자리인지는 모르겠는데, 조금만 더 파면 충분할 것 같아서.     


그래 보였다. 그래서, 준비한 건? 묻는 표정으로 너를 보자, 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재킷을 풀고 품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괴이하게도 네가 특별하게 생각한다고는 여겨지지 않을 법한 것들이 잔뜩이었다. 나도 제목을 알고 있는, 표지가 예쁜 시집 두 권을 빼면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최근에 취미를 들였다던 네일 아트 세트라던가, 몇 번 착용하지도 않은 나비 모양 머리핀이라던가. 지나치게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들. 한 손 크기만 한 소형 지퍼백도 있었는데, 심지어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 이건 뭐야?     


- 휘파람.     


빈 봉지를 들어 보이며 네가 가볍게 웃었다. 투명한 시야 너머로 너의 입술이 뭉그러졌다. 너는 휘파람이 빠져나갈까 봐 염려하는 듯한 동작으로 조심스레 그 입구를 다시 한번 손톱으로 꾹꾹 눌러 밀봉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 이런 걸 왜 묻으려는 거야.     


- 어차피,     


그러나 네가 대꾸하려던 말을 와르르 흐리는 바람에 나의 질문은 그대로 와해되었다. 한동안 네가 그러고 있기에 더 이을 마음은 없어 보여 나는 몸을 돌려 삽을 들었다. 손잡이가 부러져 나간 부분을 팔뚝에 받치고 이미 파여있는 부분을 가장자리부터 아래로 파나 갔다. 한 뼘 정도를 더 파고 보니 이 작고 무가치한 것들을 묻기에는 아주 충분해 보여서, 툭 시선을 던지자 그제야 너는 고개를 끄덕여 응수했다.  

   

- 너 먼저 해.   

  

안 그래도 먼저 쪼그리고 앉아 물건들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는 너를 슬쩍 떠밀어 놓았다. 나는 달리 챙길 것이 없어 부자연스럽게 네 옆을 서성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집 한 권을 묻을 예정이었다. 표지 뒤편에 서로에게 쓰기로 한 엽서도 한 장 넣어두었다. 결과적으로 들고 오지 않았지만.


너는 그나마 가장 무거운 것부터 차례로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물건이 낙하할 때마다 풀썩 흙더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문득 구덩이를 들여다보았다. 네 물건들은 다 합쳐서도 한 겹이 채 되지 않아 보였다. 뭐가 뭔지 잘 알아볼 수도 없었다. 너무 깊게 판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도로 흙으로 다 메워야 할 판이었다. 마지막으로 네가 쓴 엽서 한 장이 팔랑거리며 안착했다. 내가 챙겨 오지 않았으므로 답신이 없을 편지였다.


- 너는?     


들뜬 소리네가 재촉했다. 나는 생각 구덩이에 빠뜨린 정신좀처럼 건져 올리지 못했다. 너는 얼이 빠진 나를 가만 지켜보더만은, 돌연 눈앞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며 어스름한 웃음을 입가에 매었다.    

 

- 네가 뭘 담고 싶어 하는지 알아.

     

말투로 보아 궁금해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내가 그런 말을 적이 있었는가만 단순히 의뭉스러웠다. 네가 천진한 걸음으로 구덩이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풀쩍 뛰어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무심한 표정을 지울 새도 없었다. 네 허리께까지가 순식간에 구덩이 안으로 숨겨졌다.     


- 짠, 담았다.    


- 널 묻으라고?    

 

- 그래줄 거야?  

   

흙바닥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맨 팔을 꿰어 올려두고, 그 위에 턱을 괸 너는 어쩜 그렇게 망설이지도 않고 물을 수가 있니. 실은 그냥 네가 이 여름과 함께 영원히 잠들고 싶은 것은 아니니. 여름이 가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는 너를 빗대어 그런 농담을 하려다가, 그 말을 하는 데에 너무 많은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너는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침묵이 오래 이어질 성싶으면, 반쯤 남은 네 상반신이 꿈틀거렸다. 통째로 집어삼켜지는 어떤 종류의 먹잇감처럼.


네가 턱을 가로 돌려 손등 위에 뺨을 눕혔다. 잠시 눈을 감았다. 속눈썹들이 불필요한 떨림 하나 없이 얌전히 따라 내려앉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네 머리 위에

불필요한 속삭임을 얹었다.     


- 거기 계속 있을 거야?   

  

- 나름 아늑한 거 알아?     


반문하는 너는 그날따라 웃음이 많았다. 네 정수리를 훑고 지나가는 산뜻한 바람을 차분히 살폈다. 뿌리에 한 번 걸리지도 않고 부드럽고 빠르게 네 무성한 머리숲을 빠져나갔다. 어딘가로 이끌리듯 스르르 움직이는 네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 놓고 싶었지만, 내 손가락은 닿는 순간 바로 엉겨 붙고 말 것이었다. 나는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바람은 되어줄 수 없었다.      


- 있잖아, 묻으면 다 사라지는 거야. 사라지면서 그걸 이루던 입자 몇 개 정도는 추억으로 변할 수도 있을 테고그러려고 묻은 거면서도 슬퍼지겠지, 조금은.

    

뭉텅이 진 구름이 하늘에 만연해서, 자꾸만 있다 말다 하는 햇살이 네 하릴없는 독백을 비추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한숨은 바람을 닮았다. 여기 묻어버리게 되는 것이 너라면, 그래서 나중에 다시 찾으러 와야 할 것이 너라면, 그러나 그때쯤엔 말끔히 존재를 지우고 추억 따위의 덧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있을 너라면-분명 그럴 것 같다고, 나는 아주 많이 슬플 것 같다고, 부끄럼 많은 나의 독백 같은 건 한 칠도 덧대지 못했다.     


- 그러니까 잠깐만, 잠시 동안만 이렇게 담겨 있을게.

     

작은 파도처럼 하얗게 일었다 부서지는 너의 목소리가 나를 전율케 했다. 나는 네가 거기 묻히지 않으면 내 추억은 끝내 남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다만 여태 네가 ‘담는다’라고만 표현하고 있었음을 깨달아버렸고, 너를 자꾸 ‘묻으려’ 했던 건 도리어 나였음을 불시에 알았을 뿐이었다.     


흙더미 위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아버렸다. 그럼 나도 잠깐만, 잠시 동안만 이렇게 머물러 있을게. 그리고 너를 다시 꺼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저 아래에 놓인 것들이라도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묻어주자. 그러고 나서 너와 이 산을 내려가, 이다음의 계절을 아무렇지 않게 살면 된다. 이 여름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기까지는, 이 여름에 살던 우리를 완벽히 잊어버리게 되기 직전까지는. 여기 다시 발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게 당장 다음 달이 될 수도 있다. 마음의 준비는 그다지 필요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대답해.

그럼 너는 사라지지 않는 거지.

그러지 않을 거지.


나중에, 뭐든 말해줄게
누구도 숨기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되면
나중에, 새벽이 선연히 짙어지면
그나마 따뜻한 밤을 보냈었다는 것을
쓸쓸히 일깨우게 되면
너에게로 갈게
•••
세상 가장 완벽한 외로움이 되어
너를 찾아갈게
- 이닻,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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