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는 침묵, 바깥에서는 정적. 그사이 너무 크게 파버린 괴리감의 우물로 차가운 여름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너를 여름이라고 부를 뻔했다.너를 알긴 아는데, 한순간 몸이 냉랭해질 정도로 깊이 느껴오는 너인데,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다만 이름이었다.
애초부터 몰랐던 것처럼 얕게도 짚이지 않는 너의 이름.
헐렁한 반팔 티에 통 큰 청바지를 입고, 양말 없는 발목에 흰 운동화를 꿰찬 너는 집이 바로 이 근처라 했다. 언제까지고 마당에 나무가 있고 대문이 있는 주택에서 살 것 같았던 너는 네모반듯한 빌라들이 즐비한 골목 쪽을 가리켰다.
-날 잘 모르는구나.
너는 무서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또 보이는 것은 말간 웃음이어서 나는 퍽 혼란스러웠다. 허둥대며 변명하기를 속으로만 했다. 알아, 우리 오랜만이잖아, 부터-너에 대해 말하자면 쓸 수 있는 형용사만 해도 수십 개야, 하는 두루뭉술한 말들만 맴돌았다. 해마다 너를 잘 간직하고 있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이름 한 번 부르는 것이 더 믿음직하겠지 싶어 더듬거리는 입이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미안. 실은 네 이름을 까먹었어.
-아직 우린 이름이 필요한 대화는 나누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그런 대답이 돌아와 나는 더욱 자신이 없었다. 너와 몇 마디나 더 나눌 수 있을까, 네가 부를 수 없는 사람인 채로. 불안을 표하는 나와 다르게 너는 마치 여러 개의 이름 중 하나를 버린 것과 다름없이 의연해서, 갑자기 무척이나 어른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이제 정말 어른이었기 때문에 그 생각은 또다시 나를 서글프게 했다.
우리는 어렸을 적 자주 놀았던 공터, 이제는 모래밭과 벤치 몇 개 대신에 놀이터가 들어선 공터에서 만났지만 결국 지금은 카페 안이었다. 각자 주문하고 계산한 커피의 종류는 진동벨이 울리고 나서야 종업원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내 것과 같은 색이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나 했는데, 너는 에스프레소라 했다. 네가 쓰고 신 것을 유달리 잘 먹던 것도 쉽게 기억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커피 빛깔이 너무도 짙어 드문드문 떠오르는 투명한 얼음조각이 못 먹을 것인 양 불결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섣불리 얼음을 깨물었다간 네가 무슨 말을 건넬까 하여 쓴 물만 냅다 들이켜고 있었지만, 너는 한참을 가만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이러려고 굳이 창가 자리를 고집한 걸까. 나는 차라리 공터 한 편에 자리해 있는, 우리가 곧잘 올라타곤 했던 그 나무 그늘 아래에 머물러야 했으리란 후회를 했다. 거기서는 적어도 네가 낯설게 보이지는 않으리란 안일한 생각이었다. 문득 먼 시절의 너를 회상했다.
-너, 이름이 뭐더라?
네가 전학 온 당일이었던가, 그다음 날이었던가. 내가 묻자 너는 큰 눈을 껌뻑이며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과 1년 반만의 재회였으니 그럴 만했다. 바로 옆반이라 오가는 동안 서로의 얼굴을 빠르게 알아보았고, 보아한니 집까지 같은 방향이어서 우연히 정류장에서 맞닥뜨린 와중에 물은 것이었다. 나는 네 반응에 지레 너를 외면해 버렸다.
-너무한 거 아니야? 기껏 말 건다는 게.
- …미안해.
너는 사뭇 새침한 어조로 내 이름은, 하고 말문을 텄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네가 무어라고 말한 이름은 그 순간 음소거가 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 귀가 이상한가 싶어 되묻자, 네가 혀를 내두르며 정교한 입 모양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또박또박 발음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주 미약한 울림으로밖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활자 조각처럼 네 입에서 굴러 나온 이름이 또르르 굴러 옷장 바닥 같은 곳에 쏙 들어가 버린 듯이. 이제 잊어버리지 마, 하는 그다음 말은 똑똑히 들었으므로 분명 네 이름만 소리가 없었던 것 같았다. 결국맞다, 하는 탄식으로 얼버무리곤 너를 뒤따라 걸었던 기억이 난다.
듣지 못한 네 이름이 목에 걸려 나는 대화에서 주로 듣고 있는 쪽이었다. 너는 내가 예나 지금이나 참 말이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두는 것이 편할 것 같아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 후에도 나는 결국 네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 여러 번 물었지만 그때마다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너를 부를 때에도 네 이름만 누가 파먹은 것처럼 공석이었다. 접속이 어려운 인터넷상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고, 그게 나의 부끄러운 비밀이 되어서,너를 부를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네 이름조차 모르고는 네게 감히 붙일 말이 없어서.
차츰 나는 이름을 핑계로 너로부터 멀어졌다. 부르고 싶은 마음을, 불러야 하는 이유를, 하고 싶은 말들을 부정하면서 나는 너라는 아이 자체를 부정해 갔다. 너는 나에게 그 흐린 이름보다도 뒷모습으로, 옆모습으로 굳어져 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우리는 가끔 이야기를 나눴고, 집 가는 길을 꼭 같이 걸었다. 나는 여전히 듣는 쪽이었고, 너는 말하는 쪽이었으며, 각자의 집으로 갈라지는 골목에서 네가 먼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나는 습관처럼 너를 부르려다 실패하곤 했다.
너는 웬일인지 그날은, 모퉁이를 돌아가지 않고 우리 집 쪽까지 오는 내내 옆에 있었다.
-너, 왜 안 가?
일교차가 심한 여름밤이었다. 집 앞 가로등 불빛이 곧 혼절할 듯 창백했다. 너는 그 아래서 허여멀건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옆으로 비껴 나와 어둠 속에 푹 담가졌다. 순식간에 희미한 윤곽만 남은 네가 흐물거리며, 말했다.
-난 내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낯선 추운 바람이 타이밍 좋게 네 억양을 앗아가서, 나는 네 의중을 파악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바깥만이 비치는 유리벽 안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처럼, 너는 까만 실루엣으로 내 표정 위를 빤히 기웃거리다 이내 덧붙였다.
-네가 너무 쉽게 부를 수 있는, 그냥당연하고 평범하게옆에 존재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면좋겠다, 뭐 이런 뜻이야.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삐뚤기는.
-왜 그랬으면 좋겠는데?
-음, 뭔가 더 특별하잖아.솔직히 네가 뭐라고 나를 정의하려 드니.
적잖은 충격을 받은 그 순간이,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다는 생각이 든다. 너만의 세계 속에 갇힌 듯한 네 말도, 짐짓 그 말에 탄복하던 나도. 어렸기 때문에 낭만적인 장면이 거기 있었다. 어렵사리 다시 한 발짝 가까워진 너와 내 사이로 낯선 온도의 바람이 타이밍 좋게 불어 들던, 쉽게 잊은 그때 그 계절의 이름이 아직여름이었다.
그대로 너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서도 그런 여운에 한참잠겨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었다. 차가운 품을 열어 혼곤히 안아주는 이불 안에서 나는 애착하는 곰돌이 인형을 안고 있었다. 호밀아.녀석의 오래된 이름을 부르면서, 꿈꾸듯 너를 생각했다. 너의 갈깃한 목소리를 귀 바깥에서 돌려 듣다가, 영영 네 이름은 모르겠구나, 했다. 너는 그 이름으로 정의되는 평범하고 당연한 그 어떤 것도 아니라서.
너, 너, 그리고 너, 또 너… 너를 떠올리는 것마저 그렇게밖에 하지 못해서, 그러다 불현듯-
긴 다리로 흙먼지를 달고 달리는 너, 스스럼없이 나무를 타고 올라 덜 익은 연둣빛 살구 같은 것을 와작와작 깨물어 먹는 너, 엎드려 잠든 나를 빤히 관찰하다 눈이 마주치면 아무 말 못 하게 웃어버리는 너, 아침에 머리를 감고 걸핏하면 머리끈을 욕실에 두고 오는 너, 버스카드를 두 개씩 들고 다니는 너, 별보다 달을 좋아하는 너, 별똥별이 떨어지는 날이면 지구를 다 태울 거라며 집에서 나오질 않던 너, 울음바다였던 중학교 졸업식 날 홀로 행복해 보이던, 그러나 고등학교로는 세상 가장 슬픈 얼굴로 전학 온 너, 말을 걸어놓고 내가 반응이 없으면 휘파람으로 그 공백을 메우는 너, 내용과 무관하게 늘 같은 곡이던 맑은 휘파람 소리, 하루에 한 번은 꼭 내 머리를 매만져 주는 너, 웃을 때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너, 그럴 때마다 가닥가닥 날카롭게 찰랑이는 머리카락……
너는 내가 아주 오래전 알았던 너였다가, 잘 몰랐던 너였다가, 내가 많이 좋아했던 너였다가, 그만큼 기다렸던 너였다가, 잊었던 너였다가, 다시 만난 너였다가, 전과 같지 않은 너였다가, 그래서 어색한 너였다가, 알 수 없는 너였다가, 또 별수 없이 나의 너였다가… 수많은 네가 나를 찾아왔다. 부르지 않아도 찾아온 너였다. 품 안의 호밀이처럼 단언할 수 없는, 애당초 하나의 이름이 아닌 '너'였다. 나는 그제야 네 말들을 모조리 이해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이름 없이도 서로에게 친구였다. 오랜만에 공터의 나무를 앞다투어 올랐던 날. 제법 큰 몸이 꽤나 수월하게 우리를 여름의 꼭대기로 곧장 데려다주었고, 산뜻한 햇발이 가장 긴 손가락에는 닿을 만한 곳에서 우리는 흔들리며 앉아 있었다. 너는 네가 잠시 다녀온 학교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너는 잊었으나 나에게는 있는 네 어릴 때 이야기 같은 것을 꺼내 놓았다. 2년 뒤쯤에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누군가 먼저 묻기도 했고, 우리는 음울하게 비관하다가도 열띤 희망에 잔뜩 상기되었다. 우리 집에 호밀이 말고도 오래된 인형들이 얼마나 많은지 뜬금없이 자랑하면 네가 비웃기도 하던 가벼운 추억들이 생겼다.
너는 늘 먼저 떠났고, 나는 그래서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아쉬울 때가 많았다. 여전히 네 이름은 몰랐어도 한 번쯤 꼭 너를 불러 세우기에는 더 이상 어려움이 없었던 그 무렵. 나무 위에 혼자 남아, 옷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털어내며 저만치 걸어가는 너를 향해 너, 이따가 집에 같이 가, 하고 외치면 너는 빙그르르 돌아 머리 위로 둥글게 두 팔을 올렸다.
-알겠어! 기다릴게.
네가 입속을 훤히 드러내고 웃었다. 햇빛이 네 하얀 이에 부딪혀 깨뜨려지는 모양이 눈부셨다.
상념에서 돌아와, 나는 이제 얼음이 다 녹아 수면이 다소 높아진 커피잔에 어른의 얼굴을 비춘다. 시간이 멈춘 듯한 너의 익숙한 옆모습을 바라본다. 창밖의 풍경은 너처럼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다.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햇빛 뿌려진 거리가 어떤 다른 인위적인 불빛들이 아닌 것으로 충분히 눈부시게 빛나는 동안, 보는 것만으로 몸을 스산하게 하는 기억 안팎의 여름.
-나, 너를 잘 알아.
그렇게 한 마디 꺼내자, 너는 겨우 1, 2분 남짓한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는 듯 신속하게 내게로 주의를 돌렸다. 너의 눈동자 속에서 무수히 많은 네가 별똥별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나는 모든 너와 일일이 눈을 맞추며 새로이 인사한다. 안녕.
-안녕.
네가 웃으며 화답했고, 나는 그제야 진실로 너를 불렀고 네가 그 부름에 돌아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네가 더 잊힐까 두렵지 않도록 망각의 아주 극한에서 애써 떠올려도 기억나지 않는 그 무엇이었음 좋겠어 그러니까 그냥, 지금처럼만 ••• 내내, 널 생각하고 있어 - 이닻, '머릿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