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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고메리 Aug 18. 2023

9화. 아들의 눈물, “나는 전학 가고 싶지 않아”

10살 아들의 눈물로 속상했던 그날의 기억.

  큰아이가 3학년으로 올라가던 해의 1월경일거야.

" 엄마 드디어 시험에 최종 합격했어" 

외출했다 돌아온 아이에게 감격스럽게 말을 했지만, 아들은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하다. 

아마도 엄마가 선생님으로 일하게 되면, 도 지역이기 때문에 집 근처에서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고, 알고 있었나보다.

 아들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나는 전학 가고 싶지 않아“

“정말, 가고 싶지 않아”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 키우고 여러 사정이 생겨서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실패를 딛고 한참이나 늦은 40살에 이제야 제대로 출발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울음을 보였다.

  아들에게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들고, 왜 그렇게 전학을 싫어하지? 하고 생각도 해봤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어릴 때부터 낯을 가리는 모습이 있었다.  어린이집에 처음 갈 때도 매우 가기 싫어했고, 나 또한 마음이 아파서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하고 맡기고 왔다. 정 가기 싫어하는 날에는 보내지 않고 집에 데리고 있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돌이켜보니> 

  결혼하고 처음에 전세살이로 시작했기 때문에 남편이 내 집을 마련하는 일에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2010년, 큰아이가 4살이 되던 해 가을에 처음으로 분양받은 아파트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변두리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분양받은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가보면 얼마나 반짝이고 멋져 보이는지 하루라도 빨리 입주를 하고 싶었다. 

  9월부터 입주를 하고 싶었으나, 큰아이가 반대를 했다. 어린이집이 2월에 졸업을 하니 그때 이사를 가고 싶다고 했다. 당시 어린이집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 말을 존중했고, 새집증후군도 있으니 그 사이에 환기도 시키면서 늦게 입주를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4살 아이의 말을 그렇게 따라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에게는 큰아이가 소중했고, 그 의견이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환경 변화를 싫어했다. 아이의 기질이 그러하였고 그것이 10살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아이를 낳고 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 정규 직장을 갖지 않고 생활했다. 중간에 강사로 일한 적은 있었다.

암기를 잘 하지 못하는 성향이기도 하고, 시간을 내서 조금씩 공부를 하다보니,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낼수가 없었다. 어느새 20대때의 꿈을 잊어가고 있었다.

 남편의 회사일이 바쁘기도 했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육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 동기 언니도 임신했지만, 잘 다니고 있는 듯 보였고, 주변에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임용시험을 단번에 합격하는 지인들을 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도 얼마든지 시험준비해서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나의 꿈은 점차 흐려지고, 또 흐려졌다.


  주변에 아기를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맞벌이를 하던 서울에 살던 이모가 직장 일을 하는 동안 둘째를 키우기가 너무 어려워서 이종사촌 동생이 7개월경에 우리 집에 와서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서울로 돌아갔다. 사촌 동생을 엄마가 키우는 것을 가까이에서 접하기는 했으나 내가 전담한 것은 아니라서 어려움을 금방 잊게 되었다.     


  아기를 낳고 조리원에서부터 당황스러움이 시작되었다. 사람마다 아이를 세심하게 잘 돌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남편을 따라서 낯선 도시에 왔고 나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친정엄마는 큰아이 돌잔치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건강하시던 분이었기에 그 충격이 컸다. 

또한 남겨진 친정아빠의 충격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친정의 상황이 있었다.


  주변에 아는 엄마들을 쉽사리 사귈 만큼 친화적이지도 못해서 나는 육아카페(맘스홀릭)에 의지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이종사촌 동생을 돌보는 친정엄마의 손길을 대학시절에 보았지만, 내 자식을 키울 때의 예민해짐과는 또 달랐다. 작은 것 하나하나도 초 예민해지고 특히 건강 문제도 잘 몰라서 삐뽀 삐뽀 119라는 육아 서적(굉장히 두꺼웠다)을 밑줄을 치면서 정독을 했고, 수시로 찾아보았다. 

  아이가 아프면 소아과를 부지런히 데려갔고 각종 예방접종 스케줄을 중시했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금지옥엽 아이를 키웠다. 당시에 나를 지켜보던 동네 언니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항상 큰 아이를 안고 있더라” 언니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늘 안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이가 우는 것을 힘들어했다. 마음이 약해서일까? 

나는 초보엄마였다.

둘째가 태어난 후로는 또다른 힘든 과정이 있었다.


  큰아이에 대한 케어의 절정? 은 초등 입학 후 백일 등교 케어였던 것 같다. 초등 입학 후 아파트에서 작은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초등학교였는데, 또 아이에게 물어봤다. 얼마나 등하교를 같이 해줘야 하느라고. 아이가 대답했다. 100일정도?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날짜가 어느 정도 지나니, 엄마들이 많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손길이 많이 가던 아이도 3학년, 10살 정도가 되니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았다. 우리 아이는  약간 무뚝뚝했으며 긍정적인 아이였다.      

  그렇게 돌본 아이였기에 나는 아이가 엄마의 마음을 잘 알 줄 알았다. 둘째와의 터울도 5살이라서 충분히 사랑을 받으면서 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환경 변화를 좋아하지 않은 성격으로 인하여 엄마가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전학을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고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남편은 정반대의 성향이다. 나는 항상 전학을 꿈꾸고 이사를 꿈꾸는 아이였다. 공상을 좋아하던 나는 한 번씩 전학을 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 너무 좋았다. 7살까지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초등 입학 때 도시로 이사를 했는데 너무 좋았다. 초등학교 4학년 올라갈 때 또 전학을 했는데 전학 간 학교가 참 좋았다. 6학년 졸업을 앞둔 1월 말에 이사를 해서 5일 정도를 먼 거리 통학을 해야 하는데 나는 또 전학을 가고 싶었다. 엄마는 곧 졸업이니 며칠간을 통학을 시켜주셨지만. 과거의 학교가 싫었던 것은 아니다. 왠지 전학생! 하면 아이들이 쳐다보고 관심도 가고 새롭게 봐주는 모습이 상상만 해도 설레었다.     


남편은 반대의 성향이다. 어린 시절 한 번의 전학을 겪었는데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그전 친구들을 모두 잃었던, 싫었던 기억으로 갖고 있었다. 전학이라는 것이 친구와 인맥을 모두 잃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남편의 이런 생각을 듣고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어린 시절에 끈끈한 친구관계가 없었다. 워낙 정적인 성격이라서 독서하고 인형놀이하고 주로 집에서 지냈고, 당시 여자아이들이 즐겨 하던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들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외로웠을 수도 있는데,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외로움을 느낀 기억은 없고 그냥 책 보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책 속에 상상이 있고 그 상상 속에 수많은 간접경험이 나와 함께 했다.     


남편과 나의 정반대의 성향을 뚫고 새로운 성향의 큰아이가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보다도 비교적 남편은 아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남편도 낯가림이 심한 편이고 직장 초기에는 프리젠테이션 같은 발표가 있을 때 많이 떨었다고 한다. 남편은 아이 편에서 많이 생각해 주었고 자녀 양육에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큰 축이 되었다.          


  그렇게 눈물을 보이던 큰아이가 자라서 벌써 고등학생이다. 아이는 그 성향 그대로 성장하고 있다. 엄마의 발령지를 따라서 시골학교에 전학을 했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한 2년~ 3년이 지나자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원래 계획은 돌아가는 것이지만,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반대 상황이 되었다(아이러니). 

  자기는 이곳을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엄마로 인해 오게 되었고 이제는 이곳에 적응을 하였으니 또다시 환경을 바꾸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 말도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이사를 가고 싶으면, 저를 두고 가세요”

“가족들이 간다면, 나는 이곳에 남아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겠어요”

다부지게 말하는 그 눈빛에 확고감이 가득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원래 살던 도시로 가지 않고, 이 곳에 그대로 살기로 했다.     

  아이가 눈물을 보였던 10살 그 시기, 아이로 인하여 굉장히 서운했지만, 돌이켜보면 아이에게는 세계가 바뀌는 일이었다. 다른 가족들은 가족의 큰일이나 이동 상황이 있을 때 의사결정의 중심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고 정답은 없겠지만,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변화와 도전에 큰 용기를 가졌으면 하고 환경 변화에 대한 단단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으로 커가기를 바란다. 또 한편으로는 현재 소중히 여기는 환경에 대한 인연을 지켜나가는 사람으로 크는 것도 멋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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