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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고메리 Aug 20. 2023

10화.  엄마, 햇살이 좋은 오후네요.

보고싶은 엄마....


“엄마, 오늘은 몸이 어떠세요?”

“응, 몸이 안 좋고 물을 먹을 때 한쪽으로 입술이 기울어지는 것이 구안와사가 걱정이 되네”

“그럼, 얼른 병원에 가셔야죠.”     


  광주에 계신 친정 엄마는 큰아이가 태어난 해 겨울부터 몸이 안 좋으셨다. 지난번 갑상선검진에서 혹이 있어서일까? 여러모로 걱정이 많이 되었다. 아침마다 자주 전화통화를 했다.

그날 아침이 기억 속에 있다.

엄마는 한방병원에 당장 가셔서 치료를 받다가 안 되겠다 싶으셔서 근처 병원으로 가셨다.     

  대학병원은 아니었지만 규모가 꽤 있어서 어디가 아프면, 우리 가족이 종종 들르던 병원이었다. 집에서 5분 거리 병원에 엄마의 차인 흰색 세피아를 직접 몰고 가서, 주차를 하시고 응급실로 들어가셨다. 검사결과 뇌경색이 있어서 혈전 용해제를 투여하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약물로 치료가 가능하구나, 생각을 하고 투여를 하게 되었다.


  가족들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픈 사고가 일어났다.

투여를 하다가 뇌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응급수술을 하셨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되어서 중환자실에 며칠 계시다가 일반 병실로 올라오셨다. 수술을 하고 병실에 누워있던 엄마의 모습.... 수술환자가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망사천 같은 것을 두르고 계셨는데 보기에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래도 의식도 회복하시고 말도 잘하셨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요?"  "엄마 괜찮으셔?"


깜짝 놀라서 엄마의 지인, 친척들이 달려오셨다.

50대! 한참 건강에 염려도 많고 적신호가 오는 시기, 엄마의 뇌출혈과 수술소식에 모두들 너무나 놀라서 걱정도 하시고 잘 회복하라고 병문안을 해주셨다.

  당시에 친정오빠도 나도 막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상황이어서 아이들이 많이 어렸다. 경기도에 살고 있던 새언니도 18개월의 조카를 업고 달려왔고, 천안에 살고 있던 나도 12개월 의 큰아이를 안고 내려왔다. 아기들을 데리고 모두 친정집에 있으면서 엄마에 대한 걱정으로 병원을 오가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었다.     

  엄마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은 거의 채식주의자 같은 식성이었고 고혈압이 없으셨다. 가끔 혈압을 재면 저혈압에 가까울 정도. 기저질환으로 약을 장기 복용한 것도 없었고.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쪽 문제가 있어서 그쪽 치료를 받으려고 서울에 예약을 해놓은 상태.

갑상선은 그래도 금방 치료될 수 있다고 전망하였고, 건강하시던 분이었다.     


갑자기 닥친 엄마의 뇌출혈수술은 정말 청천벽력이었다. 그렇지만, 잘 치료받고 회복하면 건강을 찾을 수 있으실 거야. 희망을 갖자. 가족들과 함께 엄마의 회복을 기도했다.


어느 날 병실에서 휠체어를 타고 복도를 밀고 나갔다. 엄마와 함께하는 병실의 복도 산책.

창가에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창밖을 보며 엄마가 말하셨다.

“퇴원하면 고층으로 이사 가야겠다”

“일층은 햇빛이 안 들어서 이제는 싫다”

20년 가까이 우리는 아파트 일층에 살고 있었다. 엄마가 일층을 이제는 싫어하시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은 말씀하셨다. 모임도 하고 친하게 지내는 아파트 여사님들이 보고 싶다고 하셨다.

연락해 드릴까요? 했더니 그러라고 하셨다.

다행히 여사님들 중 한 분의 연락처를 내가 알고 있어서 연락을 드렸다.

여사님들이 모두 한걸음에 병실로 오셨다.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으셨으나, 큰 수술을 한 엄마에게 조심스러워서 아직 못 오고 계신 터였다.

오랜만에 이야기도 편히 나누고, 얼굴들을 보니 엄마가 마음이 편해지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의 수술 회복 기간 동안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고, 보고 싶은 가족, 친지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하니, 엄마의 마지막 시간들 이었을까?



  수술이 잘되고 회복기인 줄 알았으나, 갑작스러운 추가적인 뇌출혈이 있으셨다.

 엄마는 얼마 후 하늘나라로 가셨다.

만 53세. 꽃다운 나이셨다.

친정오빠는 33세, 나는 31세, 동생은 29세

직접 운전을 하고 들어간 병원에서....

나오시지를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엄마, 아이 키우는 게 참 힘들어요. 모유도 안 나오고, 하루 종일 보살펴야 하니까요”

“엄마는 우리 삼 남매를 어떻게 키웠어요?

그때는 학교급식도 없어서, 도시락도 몇 개씩 어떻게 준비했죠?   라고 내가 물으면,

  

“글쎄다.. 그때는 그게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네....”    라고 하셨다.


큰아이가 아기 때 울면,

설거지를 하시다가 안아주려고 오면서, 손이 차가우면 아기가 놀랄까 봐

손을 옷에 비비며, 온도를 올리던 그런 친정엄마였다.

무심코 보았던 그 행동이 생각나니 한없이 눈물이 난다.     


어릴 적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무게와

30대 초반에 .......

엄마와의 이별은 감당해야 할 몫이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서 현실을 부정하고 싶고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가서 한없이 가슴을 치고 싶은 고통.

그 벽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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