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고메리 Aug 26. 2023

12화. 나는 경력단절여성.

사회로 나가기 위하여 용기를 내다~

 큰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명백한 초보엄마였다. 맘카페에서 정보를 검색하기도 하고 육아책도 보면서 키웠던 기억이 난다. 동네 아기엄마들을 조금 사귀게 되어서 교류도 하였다. 우리 아파트는 아기들이 참 많아서 여기저기 젊은 엄마들이 많았다. 어린이집도 많고, 놀이터도 많은 시내 외곽의 아파트였다. 

  첫아이이다보니, 모르는 것도 많고 잘 키우고 싶었다. 노력해서 열심히 키우면 똑똑하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겠지 하는.. 새로 시작하는 조심스러운 육아...



  아이를 키우다보니 하루의 일과가 단순하다. 아이를 돌보다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그 무렵의 생활은 학교를 다니던 20대의 일상은 아예 잊고,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일단 아이가 태어나면 예방접종 스케줄이 있고, 어릴 때는 잔병치레가 많다보니 소아과를 자주 가게 된다.     


  아기엄마들끼리의 교류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누구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누구도 내 이름을 물어보지는 않았고 **엄마가 나의 이름이었다.

내 휴대폰에 저장된 지인들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엄마, **맘 , 이렇게 형성되었다.


그 시절 사귄 지인 언니는 처음에는 **엄마라고, 나를 불렀는데 나중에는 엄마라는 단어는 빼고

우리 아들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지금 17년째 연락중인데 계속 나를 아들이름으로 부른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내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한번씩 이야기하는데도 계속 그렇게 부른다.

아파트, 놀이터, 이런 곳에서 만나다보니 실명을 공유할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sns를 보다보면 닉네임이 주로 나오지만, 가끔 실명이 나와서 알게 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그랬다.     


 아이가 3살 정도되었을 때 조금 여유가 생겼다. 하루에 반나절정도는 직장일을 해도 될 것 같았고, 그 시간은 조금씩 늘어났다. 그 즈음엔 임용에 대해선 별 기대를 안하게 되었다. 시험을 보았으나 점수가 턱없이 낮았고, 도지역에서 근무지가 집근처로 발령을 나기는 어렵겠구나. 어차피 임용이 되어도 육아휴직을 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집근처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아르바이트정도로 하던 중에 처음으로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내가 살던 시의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경력단절여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 방과후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관한 교육이었는데 여러 과목에 대하여 특강을 받을 수 있고, 경력단절 여성들이 다시 취업을 할 때 도움이 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나는 큰아이가 어리다보니 종일 출퇴근을 하는 일보다는 반나절정도 일하면서 우리 아이를 더 잘 케어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또한 임신과 출산으로 사회생활이 중단되고 집에 있는 시간이 3년 가까이 되다보니 뭔가를 배우고 싶고, 사회로 나가고 싶은 갈증이 생겼던 것 같다. 학생시절에는 배움이 얼른 끝났으면 하고 생각했는지 사람의 마음은 갈대같다.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계기는 책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김미경의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라는 책을 감명깊게 읽고, 계속 밑줄을 치면서 되뇌이고 있었다.     


  경력단절 여성 프로그램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30~40대부터 60대까지 있으셔서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곳에서 60대 후반이 되신, 50대 정도에 미리 명예퇴직을 한 후 여러 사회 경험도 하시고 도전도 하시고 계시는 한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교사 자격증이 있는데, 왜 활용하지 않고 다른 분야를 준비하시나요?라고 물으셨다.

“네, 아이가 어려서 종일 일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부담스러워서요. 반나절정도 일하는 직종을 하고 싶어요"

“ 기간제교사같은 것을 해야 경력도 인정이 되고 좋아요, 학교쪽으로 알아보세요”


선배선생님은 그렇게 충고를 해 주셨다.

사실 선생님의 충고는 현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잘 와닿지 않았다.


 사실 아이가 태어나서 3살까지는 종일 근무하는 직장은 생각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남편은 바빠서 아침에 거의 8시가 훨씬 안되는 시간에 출근을 하고,

큰아이와 나는 아침잠이 많아서 늦게 일어났다.

또한 아기적에는 잔병치레도 많아서 병원도 자주 가고,

어린이집을 가지 못하고 약을 먹고 집에서 쉬어야 하는 경우도 꽤 있는데

당시에 아이 맡길 곳이 없는 상황이어서..

아침 일찍 8시 넘어서 내가 출근을 한다면,

그리고 종일 일을 한다면, 그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 힘겨운 일상이었다.     


또한 집에서 있다보니, 자신감이 좀 없었다.

사회로 나가려면 이력서와 면접, 구직활동 등 여러 과정을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그러한 과정들에 대한 의욕이 줄어들고 있었다.     

아기와 함께 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속에서 아이가 금방 커간다는 것이 미리 실감나지 않았다.

대략 몇 살 쯤부터는 내가 더 바빠지고, 직장 생활과 사회 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우리 아이는 밤에 그렇게 자주 깼다. 언제쯤 푹 잘 수 있을까?

맘카페에서는 “100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밤잠을 자주 자던 아기도 백일이 되면 길게 자게 되고, 그 때쯤이면 엄마도 좀 더 아기를 돌보기가 수월해진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은 내가 직접 경험해봐야 실감을 할 수 있었다.     


경력단절의 시간들은 다행히 길지 않았고, 큰 아이가 3살 겨울 무렵에 다른 도전을 하게 되어 사회로 나가게 되었다.     

이전 12화 11화. 시험불안 때문에 힘들었던 그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