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용기를 내자~
큰 아이가 3살 겨울 무렵이 되니 어린이집에 적응을 잘했다. 직장에 나갈 수 있겠구나, 생각이 되던 차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임용공부를 제대로 할 결심은 하지 못했다. 아기를 업고 인강을 들으며 시험을 보았으나, 점수는 형편이 없었다. 자신감은 바닥을 쳤다. 문득 예전에 대학원 다닐때, 아이를 임신하거나 출산을 했음에도 임용에 척척 붙고 논문을 잘 쓰는 것처럼 보였던 언니들이 생각났다. 내가 겉모습만 보았구나.
자세히 생각해 보니, 언니들도 힘든 과정이 있었다. 대학원 다닐때 실습기간에 입덧을 했던 지인언니는 많이 힘들어 했고 논문학기가 되기전에 한학기 휴학을 하는 과정이 있었다. 또한 임용공부기간에 몸이 아파도 도서관에 나와서 꾸준히 공부하는 다른 언니의 모습도 보았다.
"언니, 오늘은 이렇게 아픈데, 집에서 쉬지 그래요?"
"집에 있어도 시부모님이 아이를 돌봐주시고 계셔서 쉴 수가 없어"
"도서관에 나와서 빨리 공부해서 합격을 하는 것이 더 나아"
결혼을 하고, 아이가 있으면서 공부하는 언니들은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또한 감사하게도 아이를 돌봐주실 부모님의 배려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어린이집에 맡기고 효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아이를 낳고보니, 나는 마음이 강하지도 못했고 효율적으로 공부를 하지도 못했다.
어린이집에 맡겨야하는데 아이가 열이 나거나, 콧물이 나거나, 가기 싫다고 울면,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데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날은 공부를 조금밖에 하지 못했다.
또한 게으름도 있었다. 잠이 많기도 하고, 의지도 약했다.
한가지를 이루려면 다른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공부를 하려면, 일년동안은 다른 여러가지의 여유를 딱 포기하고 열중해야 한다. 하지만 여러가지를 산만하게 신경을 쓰다보니 임용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느날, 친정아빠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는 학교에 회화강사를 계약직으로 많이 뽑는 뉴스를 보았다고 추천을 하셨다. 아빠는 늘 내가 사회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다.
회화강사는 계약직으로 1년마다 채용을 거쳐야 하는 직종이었지만, 집 근처 학교에서 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되어 시험을 보고, 합격이 되어서 일하게 되었다.
처음 기대할 때에는 집근처학교로 다닐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막상 배치된 학교를 보니 순회학교로 주 2회는 다른 곳으로 출근하는 조건이었다. 양쪽 학교가 환경적으로 여건이 많이 달라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으나, 또한 두 학교를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한 학교는 아파트단지내에 있고 아이들 영어수준이 높았다. 외국 생활을 경험한 아이들도 있었다. 다른 학교는 영어를 어려워하고 알파벳을 아직 정확히 모르는 학생들이 많은 학교였다.
초등학교 회화강사는 영전강으로 불리는데 주로 아이들 영어교과를 가르치고 방과후 영어를 담당하기도 하며 영어관련 업무를 한다. 또한 방학때는 원어민선생님과 함께 영어캠프를 진행하기도 하는 직종이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한다. 경력단절의 시간을 거쳐서 학교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어서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두 학교 모두 영어전담선생님들이 영어교과에 전문성을 갖고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었다. 선생님들을 통해서 자극도 많이 받고 많이 배울 수 있는 경험이었다. 강사이다보니 주로 영어전담선생님, 원어민선생님들과 의사소통, 회의가 이루어졌고 다른 선생님들과는 교류를 많이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힘든 상황도 있었다. 가르치는 학년과 학급수가 많은 경우, 영어교실로 와서 수업태도가 좋지 않은 학급의 경우, 에너지가 많이 소요되었다. 또한 두 학교를 출근하다보니 양쪽 학교의 상황들을 모두 익혀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순회학교의 경우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출근시간에 긴박하게 움직여야 했다. 버스 시간 간격이 넓어서 놓칠 경우, 택시를 타고 급히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버스 시간을 앞차를 탈 수 없었던 이유는 큰 아이 유치원 오픈시간에 맞춰서 바로 맡기고 정류장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큰아이 4살, 5살, 6살 동안 일했던 회화강사일을 계속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둘째아이를 출산하고 아이 건강상의 이유로 부득이하게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아쉬움을 남긴 채 사직을 해야 했다.
강사일을 하면서 인상적인 기억은 함께 근무했던, 열심히 생활했던 표선생님이다. 항상 열정이 있었고, 열심히 연구하던 선생님이었다. 항상 꾸준히 공부하는 모습이 전문성의 비결이었다. 언젠가도 영어연수에 열심히 하셔서 무슨 연수를 들으시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아이 키우면서 직장다니면서 사실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겨우 겨우 출퇴근만 하고, 실력 향상을 위한 자기계발을 할 여력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일을 그만두면서 두 가지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음에 일을 시작할 때에는 임용시험을 통과하고 정규교사로 일을 시작하고 깊다. 그리고 아침에 항상 시간이 바빠서 머리를 질끈 묶고 출근했는데, 다음에 출근할 때는 머리를 감고 산뜻한 모습으로 출근하고 싶다는 정도의 바람을 갖고 있었다.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마음이 움츠려들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을 극복하고 싶었다. 또한 체력을 길러서 자기 관리를 더 잘하는 사람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