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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고메리 Aug 11. 2023

Ⅰ. 꿈을 찾는 여행   1.  고향의 봄

남아있는 기억의 조각

  

  읍내에서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고, 우측으로 시골길을 한참 가다 보면 나오는 시골 초등학교. 시간이 흘러서 한동안 분교로 있다가 지금은 폐교가 되어버린 곳. 그곳의 1980년대 어느 즈음의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정문이 아닌 작은 쪽문. 나무 사이의 작은 통로로 마을 사람들이 통행을 하였다. 학교를 둘러싼 나무들은 담장을 이루었다. 담장너머의 기와집이 우리집이었다.

  아궁이가 있는 옛날식 부엌과 작은 문을 열면 안방에서 온 가족이 살았다. 마루와의 사이에는 나무창살로 된 문, 창호지가 붙어 있었다. 손가락을 넣으면 구멍이 뚫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그렇게 살았다. 겨울에 불을 때면 바닥이 얼마나 뜨거운지! 마루에는 기둥이 있었고 마당에는 물펌프에서 물을 썼다. 조금 걸어가면 우물도 있었다.

  마당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이웃집이 나온다. 몇몇 집들은 서로에 대하여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드라마 전원일기에 나오는 것 같은 마을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면사무소에 다니는 아빠. 엄마와 할머니는 농사도 조금 짓고, 부업도 하시고 그렇게 시골에서 살았다. 당시의 사진을 보면 엄마는 응팔에 나오는 정환이 어머님같은 뽀글이 파마를 하고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하고 계셨다. 당시에는 면서기라고 하여 수입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엄마는 우리 마을보다 더 안쪽, 산 너머 유치라는 마을에서 나고 자라셨는데, 외가댁은 마을에서 높은 지대에 있었다. 가끔 외갓집에 가서 마루에 앉으면 저 멀리서 마을 귀퉁이가 보였다. 산에 가려진 그 길로 자동차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산너머에 서울이 있는 줄로 아셨다고 한다. 사람들이 서울 간다고 하면 그 길로 사라졌으니, 산너머에 서울이 있는 줄 아셨다는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어린 시절에는 명절 때마다 외갓집을 갔다. 버스를 내린 큰 길가에 가을에 코스모스가 얼마나 예쁘게 피어져 있었는지 그 예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버스를 내려가 논과 밭사이를 걸어서 비닐하우스들이 있는 곳을 지나서 걸어가면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을 쭉 가다 보면 가장 안쪽 높은 곳에 외갓집이 나온다. 동그란 형태의 외갓집 건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6살의 어느 날, 오빠는 학교에 갔다. 나도 학교 안에 있는 병설유치원으로 등원했다. 유치원 교실 안에는 동그란 놀이기구가 있었다. 의자도 있고, 팔로 돌리면 돌아가는. 그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유치원 앞마당에서 놀았다. 막대기를 들고 그림을 그리면서.... 숫자도 그리고 공주도 그리고 그러고 논다. 더웠는지 힘이 들었는지 그런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냥 땅에 무엇을 그리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는지 그 기억만 남아있다.

  한 가정과 한 가정의 경계는 크지 않았다. 초등학교로 가는 통로옆 우리 집은 대문이 없었고 우리 집 마당은 마을 사람들이 지나는 길처럼 사용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면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우리 집에 언제부턴가 텔레비전이 생겼다. 밤이 되면 몇몇의 동네아이들이 우리 집 안방으로 모였다. 모두 모여서 간식도 먹고 밥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애국가가 나오고 화면이 무지갯빛으로 변하면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다. 졸린 아이는 잠이 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은 아이들끼리 개울가로 물놀이를 갔다. 갔다가 물에 빠져서 큰일 날뻔한 기억도 있다. 모든 방문하는 곳은 다 걸어서 갔고 마을에 버스가 들어오기는 했으나 가끔이었다. 길은 울퉁불퉁했고 차가 지나가면 먼지가 자욱했다.


  시골 삼 남매. 당시로는 흔한 것이었다. 정말 평범했던 시골에서의 삶.

7살 무렵엔 가, 집에 외삼촌이 놀러 왔다. 누군가의 양말을 동생이 뺏어가서 내가 잡으러 뛰어가는데 삼촌이 내 팔을 잡았다. 그런데 팔이 빠져버렸다. 나는 어렸을 때 팔이 몇 번 빠졌다. 엄마가 팔을 잡아서 맞춰주기도 했다. 또한 이웃마을에 잘 치료하시는 분께 나를 데려가기도 하셨다. 커서 이렇게 큰 문제없이 팔을 잘 사용하는 것을 보면 엄마도 잘 치료를 하고 이웃마을분도 잘 치료하시는 분이셨던 것 같다.

  우리 앞집에는 이모할머니가 사셨다. 우리 할머니의 친정언니였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외롭게 되셔서 동생집 근처에 와 사시는 것이었다. 아들선호사상으로 인하여 나를 구박하셨던 친할머니와는 달리 이모할머니는 나를 엄청 예뻐하셨다. 어떤 사고로 인하여 다리에 총알이 박히셔서 다리가 불편했던 이모할머니는 내 어린 시절에 중요한 보살핌을 주신 분이다.

   나는 그렇게 시골에서 자랐다. 7살 겨울에 그 시골을 떠나왔지만, 4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났어도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내가 무엇을 갖고 놀았는지의 추억, 내가 살았던 집의 공기와 주변 환경들, 나를 정말 많이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던 이모할머니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바쁘게 오늘을 살아가다 보니 나의 고향에 대하여 잊고 살아간다. 고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니, 많은 것이 편리해지고 발전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시대에서 성장하고 있는 나의 아이들은 실감이 나지 않을 나의 고향과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 1950년대에 태어나셨던 엄마와 아빠가 성장하던 시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고 짐작만 할 뿐 잘 알지 못하는 흑백의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의 80년대 성장환경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흑백의 이미지이겠지.

  한 사람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평생 남아있는 조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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