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모범생답게 일단 쓰라는 말대로 일단 썼다. 습관이 되려면 시스템을 만들라기에 매일 쓸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노트북을 들고 아이와 함께 유치원에 갔다. 아이가 등원하면 도서관 열람실에서 아이 하원시간까지 주야장천 앉아서 뭐라도 썼다. 집안꼴이 엉망이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4~5개월쯤 매일 쓰다 보니 80페이지 분량의 원고가 나왔다.
일기 같은 글이었다. 일관된 주제도 없고, 심금을 울릴 만한 감동도 없고, 딱히 정보랄 것도 없는.
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궁금했다. 한글 파일에 있던 글을 수정해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글을 모아 브런치북도 두 권이나 만들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쓴 많은 글이 다음 메인에 소개되며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꾸준히 라이킷을 눌러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메일로 크고 작은 제안들이 왔다. 소정의 참가비를 내고 공저를 해보자는 제안, POD 출판을 해보자는 제안, 전자책을 만들어보자는 제안 등. 그중에는 몇 가지 간단한 인터뷰를 한 후 사례비를 지급하는 일도 있었다.
'이거 되겠는데!'
그랬다. 되겠다 싶었다. 일단 투고를 해보자. 그리고 실패하면 전자책이든 자비출판이든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자. 그러자.
그때부터 작성한 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면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뒤죽박죽 일기 같이 적은 글들을 수십 번 다시 읽으면서 주제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 글에는 공통적으로 '엄마들의 고민'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엄마'와 '사춘기'라는 키워드를 잡았다. 아주 매력적인 주제는 아니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주제를 찾은 후에는 목차 만들기를 시작했다. 어차피 나의 삶을 반영한 일기 같은 글이 많았기 때문에 소재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육아, 살림, 가족, 부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뒤죽박죽이던 글을 소재별로 모아 정리하며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랬더니 목차가 나왔다. 목차를 적고 보니 육아나 살림 글은 많아서 줄이거나 수정했고, 가족이나 부부 이야기는 부족해서 글을 새로 쓰기도 했다. 이미 써 놓은 글이 있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초고는 쓰레기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 과정에서 내 원고는 더욱더 풍성해졌다.
다음은 기획서를 써야 했다. 한 장 짜리 출간기획서. 수많은 원고 중에 내 글을 읽게 하려면 기획서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읽어보고 싶어 지게끔 매력적인 기획서를 쓰고 싶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현실을 깨달았다. 나는 백만 유튜버도 아니고, 엄청난 팔로어를 가진 인플루언서도 아니다. 블로그나 브런치가 있긴 하지만 그냥 기록 수준의 글을 쓰는 정도지 영향력도 없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전문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주부, 엄마가 아니라면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감성 돋는 글도 아니다. 내 글은 브런치에 들어오면 매일 만날 수 있는 그런 개성 없는 글들 중 하나였다.
'내 원고는 무엇으로 승부해야 할까. 어떤 점을 부각해야 할까.'
모르겠다. 내 생활은 지독히도 평범하고, 오감을 열고 사소한 일까지 느껴보려 노력해도 어제도 오늘도 계속 같은 날뿐이고, 더 이상 새로운 글은 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포기할까....'
서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주부, 엄마 같은 검색어를 넣었다. 내가 쓴 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초보 작가들의 첫 책들이 보였다. 목차도 비슷하고, 분위기도 비슷한 책들. 그 순간 또 그 감정이 올라왔다.
시기와 질투. 이런 글은 나도 쓰겠다.
그들과 나의 다른점은. 그들은 썼고, 결과를 만들었다. 책으로.
그래, 그럼 나도 결과를 만들어야지. 끝까지 해야지. 해봐야 이 시기와 질투에서 자유로워지겠지. 칼을 뽑았으니 칼춤이라도 춰야지.
투고할 출판사 리스트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