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한마디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내려오다 아파트 현관에서 경비 아저씨와 마주쳤다. 아저씨가 아내에게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오늘은 어디로 데이트 가세요?"
아저씨는 현관 계단 앞에서 휠체어를 내려주며 덧붙인다.
"잘 다녀오세요. 아주머니. 회복되시거든, 우리 사장님 좀 업어주세요."
그 말에 목이 뜨거워졌다. 아저씨가 고맙고, 아내에게 더 잘해주고 싶어진다. 이따금 아저씨는 "제가 휠체어 자격증 있습니다"라고 너스레 떨면서 휠체어를 밀어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아내도 그분 앞에서는 미소 짓는다. 그가 해준 말 때문일까. 그날 하루, 마음이 편했다.
"야, 이제 너도 파삭 늙었구나!"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갔더니 친구가 던진 말이다. 염색을 하지 않아서, 머리가 하얗게 되어갔다.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 나이에 백발이 어때' 하며 용기 냈다. 남이 뭐라고 하면 흘려들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짓궂은 말 한마디에 휘청했다.
내가 놀랐다. 나는 외모에 신경을 그리 쓰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말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막상 듣고 보니 달랐다. '내가 늙었구나' 하는 말을 자꾸만 되새겼다. 차가운 말 한마디에, 내 기분이 이렇게 망칠 줄 물랐다. 그날 저녁 모임은 씁쓸했다. 다음날 미장원으로 바로 가서 다시 염색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의 하루를 흔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의 온도를 자주 생각한다.
말은 기술이 아니다. 배움이 많다고, 지위가 높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안다. 덜 배우고, 덜 가지고, 더 거친 일 하는 사람 중에 더 따뜻한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십여 년 전, 독산동 우시장에 다녀온 적이 있다. 소, 돼지 고깃덩어리와 내장을 만지며 파는 그 속에서도 유난히 따뜻한 인사와 웃음이 오갔다. 여느 도매시장에서는 느끼지 못한 친절함에 내 마음도 열렸다. 진심이 묻은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피어나는 꽃이다.
세련된 언변이라도 거짓이 섞이면 냉기만 남는다. 그럴듯한 말보다, 서툴지만 진심이 묻은 말, 작은 배려의 말이 마음을 움직인다.
말의 온도는 마음의 온도다. 마음이 따뜻하면 따뜻한 말을 한다. 진심이 담긴 말은 가슴으로 받아들여져,
그 온기는 오래 남는다. 좋은 말은 꽃이다. 피어나는 순간부터 향기가 남는다. 좋은 말은 난로다.
불빛은 사라져도 온기는 남는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따뜻함이 번지면,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따뜻 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