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치
아직 해보지 않은 게 너무 많다. 시도조차 할 수 없었고,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건가? 생김새도 방법도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데,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어떻게 잡으라는 건가? 세상은 불공평하다. 평등은 이미 사라졌고, 앞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으로 존재할 거다. 계속된 실패는 분노로 바뀐다. 주체 없는 분노는 자신의 내면을 썩어 문들어지게 만든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보는 건 분노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바뀌는 것도 없다. 기회가 없었다는 말은 영원히 존재하는 변명으로 남는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혼자가 아니라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만약 혼자였다면 발을 들이는 것조차 하지 못했겠지만,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감이 생긴다. 성공과 실패보다 같이 즐기는 순간이 즐겁다.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용기가 생긴다. 그럴듯한 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함께인 건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시도할 수 있다. 같이 답을 찾을 수 있다. 단지 혼자가 아닌 것만으로 나를 집어삼키는 분노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은 느낌에 기분도 조금씩 좋아진다. 아무렴 어때,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언제부터 성공에 목메어 살아왔을까? 성공한 삶이 우리가 함께인 지금보다 아름답다는 보장도 없다. 이렇게 순간을 즐기며 살다가 죽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한 명의 인생이 바뀐다. 결국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거라 하지만 혼자 모든 걸 감당하기에는 나는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넘어져도 혼자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옆에 있는 지금을 감사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노력이라도 해야지. 그런데 정말 말처럼 쉽지 않다.
결국 혼자가 된다는 생각이 너무 커진 걸까? 함께 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다. 모두가 나눠가져야 될 부담을 나 혼자 짊어진 거 같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친구지만, 왠지 모를 억울함이 느껴진다. 나만 고생하는 느낌이다. 함께여서 이 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방패막이가 된 것만 같다. 가장 앞자리에서 나아가고 싶지 않아도, 뒤에서 등을 미는 친구 때문에 멈추지 못한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한다. 더 이상 즐겁지 않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오로지 나를 향한 분노가 이제는 다른 표적을 향하고 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 다반수다. 오히려 누군가 나를 더 건드려주길 바라고 있다. 연의 끈을 끊기 위해 불을 붙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모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계속된 실패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던 과거의 생각을 바꾼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시간은 흐르고 돈은 주머니를 떠나기만 한다.
결국 돈이 문제인가? 이 세상을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돈이란 말인가? 우정보다 사랑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게 돈이란 현실이 씁쓸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절벽 끝자락에 밀렸을 때, 나를 구해주는 건 돈이다. 사람은 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 버리지만, 돈은 나에게 생명을 준다. 어떻게 돈을 외면할 수 있는가? 내게 돈만 있다면, 나를 지나쳐온 모든 문제를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돈이 내 삶에 들어온 순간 마음속에 후회가 자리 잡는다. 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돈이 주는 쾌락을 행복이라 느꼈다.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과거를 떠올리면 철이 없었던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내게는 충분한 돈이 없다. 내 옆에 있는 친구가 돈이 될 수 있을까? 이미 나는 끝났다. 좋은 친구, 좋은 가족,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없다. 돈에 잠식당한 채 돈을 좇는 쾌락만이 내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줄 것이다. 결국 돈이 문제였다. 나의 가장 큰 문제가 되어 나를 죽이고 있다. 이런 몹쓸 사람 곁에 누가 남아있을까?
나만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걸까? 내 옆에 있는 친구에게는 돈의 악마가 아직 다가가지 않은 걸까? 아니면 그들에게는 굳건한 믿음이 남아 있는 걸까? 내게 느껴진 고통이 그들에게는 즐거움이구나. 나도 친구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즐거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유혹에 넘어가 모두를 증오했다. 세상에는 아직 돈보다 중요한 게 많이 남아 있는데. 나는 눈이 멀었다. 그래도 빛이 주변에 있어 다행이다. 언제 다시 눈이 멀지 모르겠지만.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을 때처럼. 잠깐이나마 눈을 뜬 지금을 즐겨야겠다. 돈은 돌고 돌지만,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는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내가 떠난 사람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주어진 잠깐의 행복이라도 최대한 즐기고 싶다.
“이봐 케니, 어, 혹시 이거 다룰 줄 알아?” 샘이 내 앞에 놓인 커다란 기계를 가리키며 나에게 ‘설마 이것도 모르고 온건 아니지?’라고 말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아차 싶었지만 나는 노아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노아는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을 뿐 아무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난 아무것도 몰라’를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지금까지 번 돈이 날아가게 생겼다.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조던 운동화를 산 것도 아니다. 심지어 마약을 산 것도 아니다.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죽은 대통령들을 진짜 하늘로 보내야 했다. 샘은 계속 뭔지도 모르는 기계를 만지고 나오지도 않는 마이크에 대고 ‘아 아’ 소리를 내보지만 전혀 기대도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노아는 계속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처럼 망연자실한 것 같지는 않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30분이 흐르고 1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이미 망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지만, 아무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래도 샘은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 무언가 하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초조하게 움직이는 샘이었지만, 처음 샘을 본 날처럼 어느 무엇도 샘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노아 마저도 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돌처럼 굳게 서있는 노아는 매일이 같은 날인 것처럼 두 다리를 바닥에서 떼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도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노아와 샘에게 해준 건 잘 수 있는 집과 굶지 않게 먹을걸 준 것 밖에 없다. 이번에는 노아와 샘이 꿈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가 이 스튜디오 안에 있게 해 줬는데, 내 꿈도 없는 마당에 남의 꿈에 들어가는걸 항상 나를 따라다녔던 ‘실패’란 녀석이 탐탁히 여길 리가 없었다. 이제 슬슬 샘도 대답도 없는 기계와 싸우는 걸 포기하고 내 옆으로와 앉았다.
“케니, 미안해. 돈만 날린 것 같네.” 샘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져 있었다.
“ 괜찮아, 친구들…..” 계속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이어가야 하는데, 이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덩치 큰 녀석이 들어왔다.
“설마 너희들 아무것도 안 한 거야?” 왠지 당황한 듯한 말투였지만, 눈빛은 황당해하는 게 더 크게 느껴졌다.
우리는 잘못하는 것도 아니고 혼나는 것도 아닌데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 전원도 킬 줄 모르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리고 덩치 녀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전원도 안 켜진 기계를 보고 괜히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했다는 것과,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탓했던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노아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고, 샘은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괜히 주먹을 부들거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입을 열려고 해도 목이 메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몸 밖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그 대상을 찾을 수 없었다. 저 덩치 큰 아저씨도 아니고 죄 없는 기계도 아니고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뭉치도 아니었다. 그냥 보이지 않았다. 눈에 아른거리는 것조차 없었다. 밖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안쪽은 어떨까? 뜨겁게 무언가가 들끓어 오르는 느낌이 강하게 오지만 눈을 돌려 보질 못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이때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느 사람은 인간은 원래 선하다라고 하기도 하고 악하다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인간은 모든 걸 가지고 있다. 내 옆에 있는 노아가 가지고 있는 감정도 내 속 안에 있고, 샘이 짓는 허탈한 웃음도 내 속 안에 있다. 그리고 꺼진 기계를 내 멋대로 움직이고 춤추게 할 수 있는 재능도 내 속 안에 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숨어있는 것들을 찾지 못하고 꺼내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그저 인간은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선 무하마드 알리의 본성이 나오고 있었다. 내 몸에 손댄 녀석에게 당장 주먹을 꽂고 싶었지만 덩치 큰 아저씨의 미소는 간디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봐, 이거 하나만 알아둬. 여기는 너희가 봐왔던 투팍, 아이스큐브, 닥터 드레, 이지 이, 스눕독 이런 친구들이 앨범을 찍어내는 곳은 아니야. 하지만 그 친구들이 살아왔던 곳이지. 걔네들도 돈이 없어 도넛을 훔치기도 했고 다짜고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는 아이들이었지. 바로 여기 컴튼에서 말이야! 다음에 올 땐 전원 정도는 켜줄 테니까, 준비되면 다시 오렴 얘들아. 그리고 입 한번 못 열어본 애들한테 사용료를 받을 수는 없지. 자, 이건 다음에 줘.”
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돈을 돌려받았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돈은 다시 가져가도 상관없다. 애초에 돈은 큰 역할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저 따뜻한 말과 손길이 주는 감정이 내 눈을 계속 두드렸다. 이제는 내 앞에 있는 아저씨가 바뀌어 보이기까지 했다. 왠지 채드의 아버지가 내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앞치마를 두르진 않았지만 내 눈은 이미 망가졌다. ‘채드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머릿속에서 갑자기 잊힌 줄만 알았던 고향 친구들이 휙 휙 지나갔다. 따뜻했다. 분명 그곳에서는 추위와 싸웠지만 내가 돌아본 길은 햇살이 충분하고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남아있었다. 다시 눈이 흐릿해진다. 노아는 웃음을 되찾았고, 샘은 앉아서 땀을 닦고 있었다. 내 앞에 서있는 아저씨는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