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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8. 2024

너, 그렇게 꽃밭이어서 뭐가 되겠어?

네, 되던데요? (Feat.태평농원 방문기)

1.

내가 귀촌을 결심한 이유는 자연농과 자급자족에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춰 보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자연농을 배우고,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영농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텃밭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제대로 된 밭 부지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놀고 있던 돌밭에다 냅다 심어야 했다.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관행농을 하던 곳이 아니라면 자연농을 실험하기엔 더 적합하리라. 놀고 있던 땅이라면 지력이 소실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는 내 오산이었다. 돌이 너무 많았고, 땅은 아주 딱딱했다. 땅에 기름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잡초밭일 때는 푸르러서 괜찮았는데, 관행농이라는 타성에 젖은 아저씨들이 주변에서 자꾸 땅을 갈고 잡초를 치워대는 바람에 이 땅이 원래 풀밭이 아니라 사막이었던 것처럼 황량해졌다. 무슨 캘리포니아 사막 보는 줄.


가장 최근 나의 밭 상태

너무 속상했다. 사람도 보기 좋고 예쁘게 꾸며놓은 곳에서 더 살고 싶고 일하고 싶지, 아무것도 없는 삭막한 공간에서 뭔가를 할 의욕이 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식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식물도 뭔가 풍요롭고 예쁜 공간에서 제 힘을 발휘 할 의지가 생기지 않을까. 이렇게 처량하게 제 친구들을 적으로 여기며 다 뽑아 죽여두고 너희들만 쑥쑥 자라라며 벌거벗은 땅에 덩그라니 남겨두면 우울해질 게 분명했다. 식물을 밭이라는 곳에 수감해두고 인간을 위해 뭐든 생산하라는 식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건 식물 착취 또는 식물 학대다!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식물이나 인간이나 기본적으로 생명체의 매커니즘을 공유하는 것은 동일하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식물로부터 진화했기 때문에 우리의 매커니즘이 식물에서 기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처량한 꼴로 밭을 만들어두고, 잘 자라기 바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상호작용, 상호 교류, 상호 보완 등 "관계"가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야 한다. 다른 녀석들을 몰아내고 나와 똑같은 것들로만 채워놓은 상태에서 번성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관행농은 그 생태계의 연결고리를 무시하고, 생명의 본능을 듣지 않는 무식한 농사다.

 

진짜로 무식하려면 차라리 아예 모르는 게 낫다. 모든 걸 자연에 맡겨버리는 거다. 식물은 애초에 인간이 없을 적부터 스스로 자라왔다.





2.

아무튼, 나는 이렇게 식물을 불쌍해 보이게 만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농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고집 센 아저씨들이 어린 여자애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거니와 나 또한 실제 자연농 밭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참고하고 싶었다. 늘 영상이나 책 처럼 이론만 봐왔지, 진짜 자연농 밭의 생김새나 식재법을 실전으로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담당자님께 부탁드려 태평농원에 방문하고 싶다 하니 그 자리에서 바로 견학을 잡아주셨다. 덕분에 정말 태평농원에서 자연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볼 기회가 생겼다.


태평농원 유튜브:

https://www.youtube.com/@Taeyanggang


태평농원 사이트:

https://eohdo.cafe24.com/


태평농원 농법:

https://youtu.be/CrQvyrr-VzI?si=Iq1HTXpNA33zfDva



3.


도착하니 외벽에 이런 게 붙어있었다. 한국자연농협회? 이런 것도 있었나. 도착하자마자 저런 귀한 게 존재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견학 스케줄은 1부 교육, 2부 일자리 체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육에 앞서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농장주분께 내가 채식주의자라고 했더니 곧바로 비건이냐고 되물으셨다. 세상에, 비건을 아신다! 나이드신 분들은 보통 비건이 뭐냐고 하시는데, 역시 이런 쪽으로 조예가 있는 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자연을 얘기하는 모임에선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들으시는 분을 전혀 보지 못했다.


명상이나 단전 호흡, 건강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사실은 순환 농법도 명상도 다 한국이 그 발상지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건강한 당분도 조상들이 보리를 발아시켜 만든 조청이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농장주님의 짝꿍님은 그 조청을 만드는 전통식품 명인이셨다. 나중에 조청이나 장 담그는 것도 배워보고 싶었다.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조화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생태계의 조화를 잘 맞춰만 주면 알아서 건강히 자란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농부는 그 조화를 맞추기 위해 균형을 조절하는 역할만 해주는 것이라고.


관행농에 익숙해져 있던 분들은 이것저것 투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계속 질문하셨다. 농장주님은 전혀 아니라고, 오히려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외부에서 자꾸 무언가를 넣어주면 식물이 게을러져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강인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인간이 밥을 넣어주는데 식물이 뿌리를 튼튼하게 내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그 외에도 동양 철학적으로 접근한 퍼머컬처와 자연농 등에 대해서, 생태계의 균형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자꾸 말을 잘라 먹는 아저씨가 있어서 흐름이 끊겼다. 나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제발 가만히 계시라고요. 이런 귀한 자리에 와서까지 강사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관행농 아저씨 얘기나 듣고 싶지 않았단 말이다.



4.

강의는 대표님의 아드님 분께서 진행해주셨다. 딱딱하거나 진지하거나 무거운 느낌이면 어떡하나, 괜히 무서웠는데 전혀 아니었다. 굉장히 에너제틱하시고, 활기차고, 밝고, 긍정적인 분이셨다. 강의도 재미있게 가볍지만 필요한 내용은 전부 담아 알차게 진행해주셨다.


완전 놀고 먹는 농법이에요 이거. 기반만 만들어 주잖아요? 그럼 뿌리기만 해도 알아서 자라요. 할 일이 없어요. 수확할 때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건 또 바로 수입으로 연결되니까 할 만 해요.


놀고 먹는 농법, 풀을 뽑거나 밭을 갈지 않는 농법, 노동력이 덜 드는 농법으로도 실제로 수확이 되고 식물 생장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시니 함께 교육에 참여한 다른 분들도 반응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자연농은 투자를 적게 하는 농법이다. 관행농처럼 기계값이나 비료값, 기름값이 들지 않으니 적은 돈으로도 할 수 있었다. 귀농해서 이것저것 돈 들여 하기 싫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는데 결과적으론 저투입이니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지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연농은 기후 위기 시대의 가장 최첨단 농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술력도 필요 없으니 원시적인 농법이라고 뭐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자연의 원리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 나면 스마트팜이니 ICT니 하는 것보다도 훨씬 앞서 나가는, 그야말로 미래를 내다보는 첨단 농업이라는 것이다. 동의한다. 스마트팜도 ICT도 수경재배나 LED 식물공장도 전혀 새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냥 기존에 하던 방식을 업그레이드 했을 뿐이다. 패러다임이 바뀐 게 아니라는 뜻이다. 기후위기를 가져 온 바로 그 정신의 계승일 뿐이다.




5.

자연농 일자리 체험이 이어졌다. 호박 모종 심는 작업을 돕기로 했다. 평소에는 만 오천 평 되는 이 넓은 밭에 혼자 힘으로 다 심는다고 하셨다. 예삿일이 아닐텐데, 대단했다. 이렇게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 생체 동력으로 움직여 일을 한다면 체력적으로나 신체적 단련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밭은 시원했다. 나는 뙤약볕과, 뜨거운 땅과, 들러붙는 벌레와 진흙, 다리를 따갑게 스치는 풀들을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시원하게 부는 바람. 꽃으로 뒤덮인 들판. 생각보다 벌레도 많지 않았고 농작업 환경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 이런 꽃밭에서 일을 하는 건가, 싶었다. 헤어리비치 꽃이 만개한 푸른 들판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몸을 움직이는 일이라니.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호박 모종을 나르면서 정말 행복했다. 내가 이 먼 곳까지 내려 온 게 다 여기 오기 위해서였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내가 이런 거 하려고 여기 왔지.


 호박 모종들.


쭈그려 앉아서 호박 모종을 심는 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2시간 정도 앉아서 모종을 심고 있자니 은근 코어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간만에 운동하는 기분이라 오히려 좋았다. 정신적으로 힘들 일이 하나도 없었다. 다음 날 근육통으로 고생하긴 했지만 이건 내 근육이 약해진 탓이리라. 안 쓰던 근육을 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놀랍게도 호박 밭.


작물만 황량하게 늘어서 있는 내 밭이 문득 부끄러웠다. 초록이 뒤덮고 있으니 사람도 이렇게나 기분 좋은데, 풀이라고 다를 것이 있으랴. 사람도 식물도 즐거운 공간이라면 일할 맛이 날 터였다.


이런 꽃밭에서 뭐가 되겠느냐고, 잘 모르는 분들은 그렇게 타박을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네, 뭐가 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력이 좋아져 뭐가 더 잘 된다. 식물이 스스로 균형을 갖추면서 상황은 갈수록 좋아진다. 처음엔 안 되는 것처럼 보이고 분명 생산량도 떨어질지 모르지만, 자연이 날 때 부터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초반의 뒤처지는 수확량은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


인간의 단기적 이익, 눈앞의 욕심이 아니라 식물의 본능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며 봉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로 잘 짓는 농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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