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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y 11. 2024

귀촌, 아무 데나 하지 마세요

귀농귀촌 일주일, 숙고해야 할 사항

1.

시골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는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시골에 가면 뭔가 달라질 줄만 알았다. 도시에서의 우울감, 무력감, 무기력함, 무료함 등을 자연의 품에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농사로 몸을 많이 움직이면 강박증적으로 운동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고, 맑은 공기를 마시면 저절로 삶의 질이 조금 높아질 줄 알았다. 하늘이 맑으면 자연스럽게 산책이 하고 싶어질 거라 믿었다. 이왕 가는 거 나랑 잘 맞았으면 좋겠다. 그런 부푼 마음을 안고 내려왔던 터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전혀 아니었다. 시골에 내려온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시골도 시골 나름이었다.




2.

시골 살이 단상: 나와 잘 맞는 자연환경을 찾자


지난 5월 5일,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나는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했다. 날씨가 나에게 외출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원래 살던 집이었다면 비가 이렇게 퍼붓도록 내려서 기분이 가라앉더라도, 수영장에 가서 이 무기력함을 떨쳐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살던 동네도 아니고, 익숙한 동네도 아니고, 좋아하는 동네도 아니고, 연고가 있는 동네도 아닌 곳에 오니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주변에 마을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바다가 있어도 걸어 다니기엔 너무 먼 데다가 온통 찻길이라 위험하기까지 했다. 바다는 헤엄칠 수 있는 바다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서해 바다는 그닥 예쁘지가 않았다. 나는 꼭 수영이 아니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자연이 있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농촌에 와도 하는 일이 없으니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없으니 영혼이 죽는 것 같았다. 숙소가 산 중턱이라 돌아다니기가 나빴고, 마당에 나오면 어디로든 연결되어 있는 평지가 아니니 고립된 기분이었다. 산에 갇혀 지내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자던 중 지네에 물리는 바람에 엄청난 고통까지 겪었다. 그 뒤로는 마음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또 지네에 물려서 그 고통을 맛보게 될까 겁이 났다. 지네 ptsd가 생길 것만 같았다.


어디 그뿐이랴. 여긴 아주 거미 천국이었다. 내가 거미집에 기생하고 있는 건지 거미가 내 집에 들어오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방에 안 들어가면 거미가 줄을 쳐 버린다니까. 맞춤법의 중요성 챌린지도 아니고, 매일매일 외쳐야 했다. 떼줘, 왕거미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파도 대신 벌레의 향연에 이골이 났다. 그놈의 벌레... 지긋지긋해 죽을 것 같았다. 고작 일주일에서 열흘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한 달이나 집을 비웠다 돌아온 거면 말도 안 해. 왜 매일 사용하는 공간에 거미줄이 생기냔 말이다. 지네는 방에 3일 단위로 쳐들어왔고 언제 어디서 또 나타날지 몰라 벽에 기대어 앉는 것조차 불안했다. 바다는 이렇게까지 벌레가 많지 않았는데!


인도는 전혀 없이 온통 찻길뿐인 동네. 산 중턱에서 면허 없는 뚜벅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홈프로텍터로 갇혀 지내야만 하는 신세. 그렇다고 자급자족할 거리가 밭에 널린 것도 아니라 마트도 가야 하고 다이소도 가야 했다. 택배사가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었다. 정수기도 없어서 식수는 사 마셔야 했다. 정수필터를 구입할 수도 있겠지만 몇 달 뒤에 돌아갈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플라스틱 생수를 사 마시는 건 한국에선 처음이다. 버스는 언제 오는지도, 어디에 서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긴 오나. 하루에 다섯 대. 배차가 극악이었다.


모든 걸 감수하기엔 산은 너무 재미가 없고, 위험했다.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으며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지나치게 일이 없으니 우울했다. 산을 좋아하는 장년층 아저씨나, 이미 일 할 만큼 지겹도록 일하고 은퇴해 연금 받으면서 편히 쉬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산과 잘 맞지 않았다. 산에 있는 곳인 줄 알았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거다.


여긴 심지어 주변에 축사가 있다. 축사라니... 축사로부터 반경 1.5km 이내에는 가급적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왜 이런 곳에 왔을까. 알았다면 역시나 여기 오지 않았을 거다. 어제는 산책하러 나갔다가 축사 냄새에 한 번 기겁하고, 축사 옆 대파 밭에 두 번 기겁했다.


자연만 있으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자 하는 일을 편하게 펼칠 수 있는 지형인지, 그런 지역인지, 선호하지 않는 시설은 없는지 주변 환경을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차라리 괌이나 보라카이, 오키나와가 그리웠다. 매일 바다가 보이고, 걸어서 바다에 나갈 수 있고, 집 앞에 걸어 다니기 좋은 길이 있어서 굳이 집구석에 있고 싶지 않은 그런 곳.


내가 원했던 자연.


강제로 집구석에만 있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집구석을 뛰쳐나가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은 곳이 나와 더 잘 맞았다. 땀 흘리지 않으면서 여름에도 시원하게 운동할 수 있는 건 수영만 한 게 없었다. 산은 질리는데 바다는 질리지가 않았다. 너 산에 갈래, 마다가스카르 바다로 갈래? 묻는다면 닥치고 후자였다.

잊지 마 내가 두고 해녀 수트. 수트 도로 가지러 가야 할 듯. 놓쳐버린 제주 생활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해녀 수트 이야기 1화 참고

https://brunch.co.kr/@dailyphilosophy/69




3.

시골 살이 단상: 나와 잘 맞는 주거 공간을 찾자

시골집을 직접 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떤 형태의 집인지 혹은 숙소인지도 꽤나 중요하다. 현재는 1인실 독채를 쓰고 있는데, 물론 눈치 볼 사람도 없으며 샤워를 빠르게 해결해야 할 필요도 없고 마음 편하게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전화를 해도 되니 좋긴 하다.


하지만 이래서야 그냥 시골 사는 독거 청년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게 더 좋다. 물론 서로 눈치도 봐야 하고, 온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겠지. 그럼에도 집에 혼자 틀어박혀있으니 적적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흡사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비자발적) 백수'의 무능감, 무력감, 우울감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수다 떨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으니 이 적막을 혼자 이겨내야 했다. 개같이 잔소리를 듣더라도 엄마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자꾸 보라카이 봉사활동 당시 머물렀던 나바스의 숙소가 떠올랐다. 그 숙소는 외부에 공용 공간이 있어서 답답하지 않고 탁 트인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식사와 회의는 야외 공용 공간에서 이루어졌고 이것저것 기타 잡일을 해야 할 때면 공용 공간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할 수 있었다. 방은 적당히 안락한 2층 다락방을 썼는데 안정감과 로망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구조였다.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적적하지 않아 좋았다. 새로운 얘기 거리, 대화 거리, 할 거리가 생겼다. 시끌벅적 요란한 건 싫지만 사람들과 적당히 부대끼고 사는 느낌이 드는 게 좋았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었고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수도 있었다. 사람들과 상호 작용할 수 있으면서도 그게 바닷가라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니 마음이 충만했다.


나바스의 숙소.

적당히 개인 공간이 보장되면서 실외와 연결되는 공용 공간이 있는 곳. 그런 공간이 나와 잘 맞는다는 걸 느꼈다.




4.

시골 살이 단상: 내가 좋아하는 작물을 기를 수 있는 곳을 찾자

어디든 무슨 농사가 잘 되고, 무슨 작물이 잘 자라는지가 다르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 기르고 싶은 것을 기를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키울 맛이 난다. 여기는 고구마 밤호박 무화과 등이 유명한데, 사실 그건 나에게 2순위지, 1순위는 아니다. 나에게 1순위는 사과와 감자다. 정말 평생을 사과 감자 돌려 먹으라 해도 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과일과 구황작물이다. 그래서 사과와 감자 농사를 배우고 싶어 경북에도 지원했었는데. 그냥 경북으로 갈 걸 그랬나, 땅 치고 후회 중이다.




5.

시골 살이 단상: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곳, 성향과 잘 맞는 곳으로 가자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곳. 진짜 관심 1도 없는 지역은 웬만하면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서 자기 효능감을 느끼는지 아닌지가 자존감에도 그렇고 정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데, 아무리 피톤치드가 어쩌니 저쩌니 해도 반 강제적으로 갇혀 지내느라 우울하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인간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왔기 때문에 쓸모 있다는 감각이 자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요양이나 휴양 차 가는 곳이라면 크게 상관없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잠깐이다.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발이 묶인 채 지낸다면 미래도 묶인 채 커질 수 없을 것이다. 자유롭게 내 뜻을 펼칠 수 있을 만한 공간인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곳이 어떤 곳인지 구체적인 그림 또한 그려두어야 한다. 내가 귀촌을 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목적인지, 어떤 삶을 그려나가고 싶은지 확실하게 방향을 잡아두는 것이 좋다.


활동적인 편인지, 조용하게 지내는 걸 선호하는 편인지, 느슨하게 지내고 싶은지, 에너지를 밀도 있게 사용하며 지내고 싶은지 등등 스스로의 성향을 제대로 파악해 두어야 한다. 같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다른 분들은 뭐 느긋하게 지내셔도 좋은 모양인데 나는 아닌 듯하다.


나는 일단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나를 바쁘게 만들어야 기분이 좋다. 이것저것 일 벌여놓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기획해서 펼쳐볼 수 있는 환경이 좋다. 적당히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는 것을 선호하고, 귀찮음이 심해 접근성이 떨어지면 나가기를 포기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만 있는 것은 또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밖으로 나가고 싶게 만드는 요소가 눈앞에 보이는 환경이 좋다. 고립된 느낌보다 탁 트인 느낌이 좋다. 평지가 좋다. 산은 별로고, 바다가 좋다. 젊고 기운이 있을 때 팔팔하게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다. 또한 나는 모험 같은 삶을 꿈꾼다. 역동적이며 스펙터클한 매일을 보내고 싶다.



그런 내 성향을 고려하면 지금 지내는 곳은 영 아니었다. 생태적으로 살고 싶어서 내려와 놓고 배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니. 차가 아니면 살 수 없다니. 이건 역설이었다. 음식물 쓰레기가 퇴비가 되지 못하고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너무 아까워 농사 지을 땅이 필요했던 건데, 이런 문제는 도시 농업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듯하다. 베란다 텃밭이나 옥상 텃밭을 두고 퇴비함을 활용하면 가능하다. 자연농을 하고 싶은데 온통 관행농 투성이에 플라스틱 생수를 먹어야 한다고. 정말 아니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도시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주말 등을 활용해 자연농 학교나 퍼머컬처 수업을 듣는 편이 좋겠다.


그래, 반농반X. 나는 반농반X가 하고 싶은 거지, 전업농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나의 농사는 자급이 목적인 생활 기반이지, 그것이 내 인생의 올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달리 하는 일도 없이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동안 인생을 낭비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영 석연치 않다. 난 사람들을 만나고 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다. 이런 요양원 같은 일상은 사양이다.


적적한 동네.

일주일 정도 지내보니 긴지 아닌지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까진 정이 가지 않는 이곳에서 계속 버텨보는 게 답일까. 회의와 자문을 반복하며 고민하던 중, 우연찮게도 어느 귀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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