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시골로 향하게 된 것은 조금이라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을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사과, 주식으로 자주 먹는 작물인 감자, 식탁 위 기본 중의 기본인 쌀을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경북 프로그램에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그쪽보다 다른 곳에서 합격 발표가 먼저 나는 바람에 여기로 오게 됐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후회 중이긴 하다. 사과, 감자, 쌀농사만 지을 줄 알면 그 세 가지를 가장 자주 먹는 나로서는 먹고살 걱정은 덜 수 있을 텐데. 주식 삼아 먹는 농산물을 재배해 볼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더구나 여기에 왔더니 참가자를 위한 실습용 밭이 없었다. 주기적인 영농 실습이나 농사 교육을 위한 내부 교육장도 없었다. 너무 성급하게 여기로 오겠다고 했나. 차도 면허도 없으니 어디 나가기도 애매했고, 버스조차 자주 다니지 않는, 그야말로 시골 중의 깡시골인지라 발이 묶인 채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와 버렸으니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2.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나마 여긴 자유도 하나는 거진 오픈월드 RPG급이었다.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의견만 내면 적극적으로 반영해 주는 편이었다. 밭으로 쓸 공간도 달라고 해서 얻었다. 그렇게 자연농 아닌 자연농을 시도하게 되었다.
맨 땅에 무언가를 심어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내 고집대로 하겠다고 객기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내 옆으로 밭을 갈고 잡초를 뽑아내어 완전히 관행 밭을 만드신 분들이 오며 가며 훈수를 두었다. 이거 이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하면 잘 안 자라.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저는 그냥 제 방식대로 해 볼게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랬다가 괜히 다 죽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밭을 갈기에는 완전히 돌 밭이라 내 힘으론 역부족이었던 데다가 땅을 뒤집고, 갈고, 잡초를 제거해 맨 땅으로 벌거벗기는 순간 땅에 있던 탄소가 빠져나가게 된다는 걸 알았다. 밭이라고 해봐야 한 평 남짓 되려나. 심은 것도 별로 없으니 농약이나 비료는 당연히 안 칠 예정이고. 그래서 여기에 무경운과 무제초를 더해 완전 無농법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없는 것은 농약, 제초, 경운, 비료뿐만 아니라 지식과 경험도 포함이었다. 내가 하는 건 4무 농법, 6무 농법도 아니고 그냥 전무농법이었다.
내가 나를 믿질 못하니 남의 말에 휘둘렸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훈수 두는 분들의 말을 반은 흘려 들었으나 반은 신경 쓰였다. 관행적인 방법으로 하고 싶진 않은데, 완전 자연농을 하자니 노하우가 없고. 애매했다.
내가 만들고 싶었던 밭은 풀이 무성한 밭이었다. 샛누렇게 벌거벗은 땅에 내 작물만 외로이 심어져 있는 그런 밭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밭 주변의 잡초도 제거하지 않았고, 베어준 잡초는 그대로 땅에 덮어 풀 멀칭을 해주었다. 외롭고 쓸쓸하고 벌거벗은 밭이 주는 인위적인 느낌이 싫었다.
다른 분의 밭.
3.
이런저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식물들은 꽤나 잘 자라주었다. 뿌리만 튼튼하면 자리를 잡고 자라나는 건 금방이라는데, 다행히 엉망진창 재식 실력에도 불구하고 뿌리를 잘 내린 모양이었다. 식물들이 내 마음을 읽어준 것만 같았다.
고추는 벌써 열렸고, 상추나 치커리, 청경채도 처음 모종을 심었을 때보다 많이 자라난 것 같았다.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애가 벌써 이렇게 많이 컸어요, 하고 자랑하는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밭과 작물에 이름도 지어주었다.
다행히 내 눈에만 예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밭을 일구는 다른 분들께서도 싱싱하게 잘 컸다고 한 마디씩 해주셨다. 뿌듯했다. 관행대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이 악물고 잘 키워내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채진스와 민희진이었다.
5.
비가 대차게 내렸다. 5월 5일, 하루종일 폭우가 몰아쳤다. 비에 꺾이거나 떠내려가거나 잠기거나 할까 조마조마했다. 걱정이 되어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밭부터 나가보았다. 거센 비로 인해 작물을 심어준 두둑의 땅이 많이 깎여 있었다. 두둑을 높게 쌓을 힘이 부족해 그냥 적당히 두둑 모양새만 흉내 내주었더니 생긴 일이었다. 이렇게 고랑이 깊지 않으면 물이 안 빠진다며 또 한 소리를 들었다. 자연농에도 두둑이 꼭 필요한 건가. 하루종일 폭풍 검색을 시도했는데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멋모르고 모종을 깊숙하게 심었던 덕에 비에 흙이 깎여 나갔어도 작물 뿌리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조금 기울거나 쓰러진 아이들은 다시 세워 주변부에 흙을 더 단단히 덮어주었고, 깎여나간 모종 뿌리 부분의 흙을 조금 보강해 주었다. 고랑 부분에 대파를 심어놓는 바람에 물 빠지라고 고랑을 더 깊게 팔 수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둬도 괜찮으려나.
내 풀멀칭을 보시더니 멀칭은 왜 했냐고 물었다. 땅이 너무 황량한 것 같아서요. 그리 대답하니 풀 멀칭을 하면 잡초 씨가 떨어져서 잡초가 더 많이 자란다고 하시는 거였다. 매일 와서 봐주는 거면 멀칭은 굳이 안 해도 돼. 일리 있는 말 같았다. 잡초 씨가 땅에 떨어져 잡초가 더 무성해질 것까진 확실히 생각하지 못했다. 농사 경험이 있는 분이니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박따박 대들기도 뭐 해 슬그머니 멀칭을 치웠다.
치워주면서도 마음 한 켠은 탐탁지 않았다.
다른 위치에 완전히 자연농을 시도하시는 분의 밭이 있었다. 그분 밭은 상태가 어떤지 보러 다녀왔다. 두둑도 만들지 않고, 잡초도 건드리지 않고, 그냥 구멍만 쏙쏙 파서 모종을 여기저기 흩어 심어 두셨는데 오히려 그쪽은 잡초들이 빗물을 빨아먹어서인지 차라리 더 나아 보였다. 젠장, 나도 차라리 아주 자연농을 해야 했나.
만약 읍내에 나가서 모종을 더 사게 된다면 그때는 반드시 다른 분들 눈에 띄지 않을 위치에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아 보는 방식으로 자연농을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6.
우려했던 바와 달리 대파가 기세 좋게 일어섰다. 눕혀 심어두면 자라면서 일어선다 했는데, 진짜였다.
고추와 청경채도 제법 많이 자라났다.
제대로 자연농을 하시는 분의 밭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주변에 자연농 밭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멘토링 담당자분께 그곳에 견학을 한 번 다녀올 수 없겠냐고 묻자 그 자리에서 바로 다음 주 견학 일정을 잡아주셨다. 와, 멋있다. 그 순간만큼은 담당자 님이 구준표로 보였다.
다른 분들도 함께 자연농 밭을 보시고 나면, 이런 형태의 밭도 있다는 걸 아시게 되지 않을까. 잡초를 다 뽑지 않아도, 땅을 갈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아시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 또한 자연농 밭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