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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리사 Feb 17. 2021

기억의 저편

웰빙 에세이 

밀물이 밀려올 때 바닷가에 서 본적이 있는가. 왠만한 돌부리는 물 속으로 휩쓸려 보이지 않는다. 좀 높이 솟아오른 바위는 섬처럼 보인다. 

'사람들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시도 있다 (섬, 정현종).  이런 시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데,  나는 이 싯구를 보면서 기억을 떠올린다. 


썰물때 섬이 솟아오르듯, 어떤 기억은 금새 되살아나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어떤 기억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밀물에 가라앉는 섬처럼, 수평선 저 너머에서 도무지 올라 오지 않는다. 


의대 본과생 시험 전날, 만일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소원 하나만 들어준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빌고 싶었다.  나같은 경우 사람 얼굴과 이름 매치가 잘 안된다. 병원 로비를 드나들때 많은 사람에게 인사를 받는 편이지만, 솔직히 누가 누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제약회사 직원인지, 학생인지, 환자인지, 보호자인지... 반면 우리 외래 간호사님은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한다.  자주 오는 환자는 물론 옆의 보호자까지 기억하고 싹싹하게 인사하니, 받는 사람에게 기분 좋은 일이다.  


기억의 원리 


내가 학창 시절에 '분명히 다 배우고 복습도 했는데 기억이 안 나요'하고 괴로와하면 선배들이 '머릿 속 어딘가에 다 들어있는거야,  필요할 때 못 꺼내서 그렇지..'라고 위로해줬었다. 그때 신경과 실습을 돌고 있던 선배가 '정리를 잘 하면 도움이 된다'고 조언해주었다. 의대 도서관에 보면 수많은 책들이 서가에 꽂혀있다. 분류해 놓은 표지가 없다면 책을 찾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본과생은 일과가 도서관에서 시작해서 도서관에서 끝난다. 새벽에 줄 서서 6시 입장, 10시 귀가 이런 반복이었다. 도서관 내부의 어두운 서가, 오래된 책은 중간중간 지나치며 봐도 눈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리정돈'이라는 선배의 조언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저런 방대한 양의 책도 정리해서 꽂아놓으면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것이니, 내가 배우는 인체와 질병의 지식도 분류를 잘 하고 표지를 붙여서 원할 때 잘 꺼낼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일은 오래 전 일인데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반대로 바로 얼마 전 일인데도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무미건조하지만, 과학적으로는 기억은 정보를 모으고 암호처럼 만들고, 저장하고 유지하고 그 다음 필요할 때 회상하는 능력이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다른데, 단기기억은 신경세포의 전기적인 활성화이고, 장기기억은 뇌의 깊숙한 부위인 해마라는 영역에서 단백질 형성이 관여한다.  사실 기억에 대해서는 다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 수면에 대해 우리가 다 모르듯, 기억도 그렇게 복잡하고 가려진 뇌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의예과 시절에 심리학과 교실에 불려가서 '기억'에 대한 테스트 대상이 되었던 적이 있다. 단어 20개 정도를 시리즈로 주고는 얼마 후 다시 기억해내는 간단한 실험이었다. 대학 들어온지 얼마 안되던 때라, 기억력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당시 교수님께서 많이 기억했다고 놀라시면서, 어떻게 기억했느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스토리를 만들어 기억했다고 대답했다. '바지'를 입고 '의자'를 들고 '교실'로 가서.. 이런 식이었다.  스스로에게도 흥미롭던 것은 나쁜 단어 (도둑) , 위험한 단어 (칼) 등은 더 기억에 잘 남았다. 아마도 위험을 피하기 위한 본능이 아니었을까 하고 교수님께 말씀드린 생각도 난다. 


  외래에서 흔히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기억력이 감퇴하는데 치매는 아닐까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뭘 꺼내려고 했는지 잊는다거나, 가스레인지위에 올린 음식을 깜빡 잊어서 다 태웠다는 등의 일은 주부들에게 흔하다. 나는 대개 웃으면서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없으시면 바빠서 생기는 건망증일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일상생활에서 낭패를 보거나, 주위에서 왜 그러느냐고 이상하다'고 말할 정도면 신경과에 가서 인지기능 검사를 받으시라고 권한다.  연세나 기저질환을 감안해서 설문검사가 빨리 필요할 때도 있다. 


기억의 왜곡과 상처 


한편 기억의 왜곡도 있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지난 일들 중에서 안 좋은 것만 , 더 깊고 선명하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처질 때,  그런 기억의 악순환에 빠져들면  당연히 더 가라앉을 터이다. 같은 경험을 해도, 같이 있었던 사람들과 나중에 이야기해보면 기억의 편향은 두드러진다.  시각 이미지화가 뛰어난 사람은 만남의 장면을 사진 찍듯이 기억하고 술술 묘사한다.  나는 모임을 주최하고도 다 잊었는데, 기억력이 뛰어난 연구원은 육하원칙에 따라 누가 모였고, 어떤 취지였는데 논의를 통해서 어떤 결론이 남고 이런 것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하는 일이 쉬워보이고, 룸메이트나 회사 팀메이트의 경우 늘 자신이 더 기여한다고 평가한다고 한다. 이런 것도 기억의 왜곡에 들어가지 않을 지. 


아픈 기억을 지우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름하여 외상 후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syndrome, PTSD). 베트남 참전용사처럼, 수십년 전 총성이 오가고 옆의 동료가 죽고... 그런 참혹한 영상이 밤마다 꿈에서 반복되어 도저히 일상 생활을 수행할 수 없는 외상 후 장애 환자들이 있다. 이들을 잘 묘사한 책이 '몸은 기억한다 (Body keeps the score)'이다. 이 책에는 신경과 의사가 외상 후 장애 환자를 인내심을 가지고 치료해서 일상생활로 복귀하도록 돕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괴로운 과거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모른 체 하는 것이 오히려 큰 문제이고, "스스로의 언어로 아픈 경험을 되살려서 묘사하고 나면"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왜 하필 언어일까?  호기심이 생겼고 수년간의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지금은 시험을 보지 않고, 오히려 시험문제를 내는 교수가 되었다. 요새는 해외학회에 가서 영어로 발표할 때가 가장 기억력에 대한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다.  오죽하면 어느 해는 계속되는 발표를 앞두고 '일등의 기억법'이란 책을 사보았을까. 그 책에서는 "반복, 정리정돈, 목표의식, 키워드"를 기억력의 핵심요소로 지적했다. 


기억을 잘 하려면 

도움되었던 부분은 이랬다. "기억의 대전제는 쾌감, 관심과 흥미이다.  모든 기억술의 핵심은 2가지이다. 첫째, 기억은 시각 이미지를 좋아한다. 둘째, 기존 정보에 새로운 것을 연결해 의미(스토리)를 부여한다. 오감을 생생하게 사용해 정보를 받아들이면 기억이 더욱 안정된다. 키워드가 생각나지 않아도 전후 정보가 머리에 남아 있으면 기억해낼 수 있다.  그리고 키워드를 서로 엮으면 스토리처럼 외울 수 있다. 

정보를 수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키워드와 달성목표이다. 키워드 안테나는 두뇌에게 내리는 나의 명령과도 같다. 두뇌는 신경이 쓰이는 일에 대해 대답을 찾으려는 습성이 있다. 질문이 많으면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래도 메모는 기억보다 강하다. 정말 중요한 사안은 메모뿐 아니라 이메일이나 일정표 등에 중복확인이 가능하도록 적는다. 기억법의 가장 기본이 반복이듯이 말이다. " 

저자는 기억과 기억법의 의미를 이렇게 부여한다. "자신감은 준비에서 나온다. 기억법은 그 같은 준비를 위한 수단이다. 기억, 기억하기 위한 노력은 소중한 사람, 시간을 챙기는 사랑이다."라고.. 

  


누군가는 기억을 되살리지 못해 아쉬워하고, 누군가는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괴로와한다. 삶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고, 떠오르는 섬이 있으면 가라앉는 섬도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준비를 하고,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물결에 맡기고,  그렇게 흘러가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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