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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리사 Mar 08. 2021

필라테스를 할 때

웰빙 에세이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외국 갔을 때가 곧잘 떠오른다. 일로부터 놓여나서 자유롭던 그 때와 무언가 일맥 상통하나 보다. 스위스 베른의 장미공원에 갔을 때, 서양인들이 모여서 태극권을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 한자가 씌여진 현수막을 걸고, 중국풍의 음악을 틀고 명상하듯 움직이고 있었다. 원으로 빙 둘러서서, 자못 신비한 태도로 조용히 느릿느릿 움직이는 백발의 노인들.  신기하기도 하고,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반가움도 느꼈다.  시카고 임상 암 학회에서  "유방암 환자들에게 태극권의 효과"라는 영어 포스터를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반가움이랄까.


필라테스는 신체 중심부 그러니까 복부, 허리(코어 하우스)를 강화시키는 운동이다. 호흡과 자세도 중요히 여긴다. 정형외과인지 재활의학과 의사인지 하는 죠셉 필라테스가 개발했다고 한다.  이차 세계대전에서 다쳐서 침대생활을 하는 병사들을 위해 만든 재활운동. 침대를 이용해서 운동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내가 아무리 좌식생활에 찌들었다 해도 환자보다야 낫겠지 하면서 시작했던 필라테스.


반복적인 컴퓨터작업으로 견통이 일상적이었고, 급기야 등줄기로 통증이 퍼지면서 재활의학과에서 물리치료도 받았었다.  그전엔 손목 인대가 늘어나서 한방 침구과도 다녔으니... 테이핑 요법에 안 해본게 없었다. 그러고보니 환자들이 자조하며 "종합병원"이라고 여기 저기 아픈 몸을 빗대는데, 나도 꽤나 여기저기 부실했던 셈이다. 흑역사야 뭐 누구에게나 있는 거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니...


필라테스는 코어 운동이면서 후면 근육을 중시한다. 어깨가 보기 좋게 펴지고 허리가 반듯해지고 엉덩이 근육이 올라가고... 이 모든 자세는 신체의 전면근육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만큼 우리는 그 중요성을 쉽게 까먹는다.


“빙산의 일각” 내가 의학강의를 할 때 자주 언급하는 용어다. 수면 아래에 우리가 모르는 하지만 훨씬 큰 대부분의 원인이 잠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한때는 태극권을 열심히 했었다. 조를 짜서 강사님을 초빙해서 병원에서 배웠었다. 변형된 무술인지라 강사님들은 절도가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점은, 평소엔 쓰지않는 근육, 이 근육이 거기 있었나 하는 사실조차도 잊었던 것을 쓰게 하는 묘미였다.

움직임은 다소 느리고, 때로 어색하고 둔해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든지 한번 시범수련을 참가하고 나면 “목 뒤가, 어깻 죽지가, 팔 뒤가 시원해요!”라고 말한다. 당시 나는 “태극권 전도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태극권을 배우고 전파하는 데 열심이었다. “아, 저는 운동 안해요. 하기 싫어요!”하는 직원들도 감언이설로 꼬여서 일단 수련에 참여시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분들을 내가 지켜본 느낌은 “아, 저 분 저렇게 팔을 돌려본 지가 몇년만일까?”하는 거였다. 그만큼 그런 분들이 어정쩡하게 하다가 점점 어딘가 능숙하게 자세가 변해가는 걸 보면 즐거웠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느끼고 쓰는 근육이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우리 자세를 받치고 있는 근육은 생각보다 겹겹이 많고 또 그 기원이 다른 근육들과 얽혀있다.


명상을 하면 무의식에 닿는다고 한다. 잠재의식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태극권의 다른 이름은 moving zen, 즉 움직이는 명상이다. 천천히 어기적거리는 듯한 동작에서 평형 감각이 좋아지고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하는 고유감각이 강화된다. 요가도 처음 배울 때 그랬지만, 늘 내달으며 쫓기는 듯한 생활로부터 잠시 놓여나 한숨 돌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필라테스를 즐긴다. 내게 필라테스는 active zen 그러니까 활발한 명상이다. 내 자신을 만나고, 스스로의 신체를 소중히 여기는 시간이다. 정신은 자유롭게 이전의 해외여행지를 돌아다니기 일쑤다. 아름답던 도시의 강가나, 나무 아래서 스케치를 하고 있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꿈꾸기만 하던 해외 장기 채재가 문득 가상현실처럼 느껴진다. 다른 때는 그렇지 않은데 익숙한 필라테스 동작을 할 때 그렇다. 예를 들면 뉴욕에서 사는 방문 연구자가 되어서, 나는 지금 기분좋게 결과물을 내고 카페테리아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다...혹은 캐나다 어떤 도시에 살면서 또 거기에서 필라테스 클래스를 들으러 운전하고 가는 중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마냥 카페에서 멍때리고 있을 때보다 그런 운동중에 슬쩍 지나가는 상상의 장면이 생생한 감각을 동반한다는 거다. 반복이 되다 보니 언젠가는 상상의 그곳에 가서 정말 그런 느낌이 드는지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다.

 뉴욕 어딘가의 대학 연구소, 일층 카페테리아는 갈색 원목 의자와 원목 라운드테이블이 있는지. 늦은 저녁 커피향이 풍기고 동북부 미국식 영어 악센트가 적당히 섞여 퍼져나오는지. 캐나다의 겨울은 눈이 그리도 쌓여 헤치고 가야 할 정도인지 등등.


아무려면 어떠랴. 현실은 대한민국, 필라테스 스튜디오 내부. 그러니까 내 신체와 의식의 내부로 짧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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